Skip to main
대통령
대통령 행사에는 어떤 스타트업이 참여할까
2024년 1월 2일에 열린 2024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서 인상 깊은 장면 하나가 보였는데요. 떡 케이크 커팅식에 대통령, 재계 인사들과 함께 스타트업 창업가(대표)들이 등장한 것이죠. 커팅식에 참여한 임재원 고피자, 강지영 로보아르테, 문우리 포티파이, 이혜성 에어스메디컬, 나재훈 트윈나노 대표 이외에도 약 60여명의 중소, 스타트업 대표들이 참여했는데요.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는 어떤 스타트업들이 참여하게 되는지 행사 후일담 등을 알아봤습니다. 경제계 신년 인사회는 누가 갈 수 있을까 경제계 신년인사회는 1962년부터 열린 경제계 최대 규모의 행사입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중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는데요. 이중 중소기업중앙회가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청년창업가협회로부터 중소 규모의 기업을 추천받아 모집했다고 합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측은 중기중앙회로부터 기준은 딱히 없고 젊은 기업들을 모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젊은 기업이라는 기준이 다소 모호해서 코스포의 이사사와 젊은 대표들로 추려서 명단을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청년창업가협회는 회원사에 공지를 하고 신청자에 한해서 내부 심사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전했는데요. 기준은 비공개라 밝혔습니다. 어떤 기업이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기엔 다소 아쉬운 답변인데요. 중기중앙회 측은 세부적인 내용까지 공유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이 참여하는 행사다 보니 공개 모집, 일정 공개 등이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남들이 기피하는 자리를 맡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는 기분이고,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다" 1884년 초가을의 어느 날, 미국 노스다코타주 배드랜드의 황막한 평원에 자리 잡은 한 목장으로 20대 중반의 젊은이를 태운 마차 한 대가 들어섭니다. 농촌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정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젊은이였죠. 마차에서 내린 젊은이의 얼굴에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햇볕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듯 창백한 혈색, 깊게 파인 눈두덩이, 비쩍 마른 몸까지 당장이라도 쓰려지려 하는 몸뚱이를 의지만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뉴욕주 주의회 연단에 올라 열변을 토하던 젊은 개혁가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죠. 그해 2월 14일, 주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그가 건강한 딸을 얻었다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됐다는 전보였죠. 하지만 곧이어 날아온 두 번째 전보를 읽는 순간 그는 마치 온몸의 영혼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의사당을 박차고 나가 뉴욕에 있는 집으로 달려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든 그의 아내와 어머니였습니다. "우리 집에 저주가 내린 것 같아.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 형수님도!" 사색이 돼 그를 맞이한 동생의 외침이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몇 시간의 차이를 두고서 각각 싸늘한 육신이 돼버린 어머니와 아내를 끌어안게 됩니다.
조지 워싱턴이 '오합지졸 독립군'으로 승리를 거둔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우리 군대의 군기 부족은 심각합니다.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는 적 앞에서 이 군대를 새롭게 조련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또 위험합니다" "나의 능력과 군사적 경험으로 이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신임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775년 7월 2일, 미국 대륙회의로부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아 처음으로 대륙군(미국 독립군)과 영국군이 맞서 싸우고 있는 전장에 도착한 조지 워싱턴이 부대를 둘러본 지 일주일 만에 대륙회의 의원인 리처드 헨리 리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는 절망 섞인 문장입니다. 조지 워싱턴,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분이더라도 그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미국, 그리고 세계 역사상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실 텐데요. 1732년 버지니아주의 평범한 농장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토지 측량사로 일하면서 토지 투자로 부를 이뤘고 이후 '프렌치 인디언 전쟁' (오하이오강 주변의 영토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에 영국 측 민병대 지휘관으로 참전합니다. 민병대장직을 사임한 1758년 이후에는 지금으로 치면 재벌집 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여성과의 결혼으로 미국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으로 거듭나죠.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7000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했던 여성과의 결혼이었지만 정략결혼은 아니었고 결혼 생활도 원만했습니다.) 1758년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774년까지 이 16년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치안판사,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을 지냈습니다.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이 시기의 워싱턴은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때 그의 의견이 존중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가 의정을 이끄는 지도자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언제나 관대한 태도로 자신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익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게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였죠.
29세 바이든이 첫 상원의원 선거에서 역전승을 거둔 5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변호사로 일하다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 36년(6선) 동안 연속해서 상원의원으로 근무, 부통령으로 8년간 재직, 대통령에 도전해 당선. 이 같은 이력만 보면 조 바이든을 전형적인 워싱턴 주류 정치인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타고난 배경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정치에 입문한 뒤 줄곧 탄탄대로만 걸어온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데요. 어린 시절부터 정치와 공직에 대한 강렬한 야망을 품어왔던 것은 분명 맞지만 그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인물입니다. 그의 집은 가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네 아이를 키우느라 항상 형편이 빠듯했던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요. 대학교와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변호사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미국 의회 인명록을 훑어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의회에 입성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변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상‧하원 의원) 중 많은 사람이 부유하고 안정된 가정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충격받았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에 진출한 사람들은 거의 변호사였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로 진로를 정했다” 이미 십대 시절부터 미래의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분석한 뒤, 이를 행동으로 실천했던 모습을 보면 바이든이 탁월한 전략가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텐데요. 특히 전략가로서의 바이든의 모습은 첫 번째 상원의원 선거 당시 그가 취했던 행동들을 분석하면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판단력과 흔들림 없는 실행력이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가 결국 미국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던 든든한 밑바탕이었습니다. 0. 거물에 도전한 애송이 1972년 선거 당시 바이든은 조그만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카운티 의회 의원으로 첫 번째 임기를 보내던 이름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는데요.
'대기만성'이 뭔지를 보여준 아이젠하워의 인생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대통령으로서 8년간 미국을 이끌었던 인물이죠. 군인으로서 그가 거둔 최고의 전공은 1943년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아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 대륙을 탈환하고 결국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무너뜨린 일이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는 이후 미 육군 참모총장, 컬럼비아대학교 총장, 북대서양조약기구 총사령관(NATO)을 거친 뒤 1952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군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두루 거친 뒤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건데요.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부드럽고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미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겸손하고 살가운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에 취임한 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총장 전용 VIP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갈 수 있었던 대학 본관 높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던 총장실을 누구나 오며 가며 볼 수 있고 들릴 수 있는 1층으로 옮긴 일이었습니다. ‘리더라면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하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가 40년 가까이 군인으로 살면서 배운 교훈이었죠.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일할 때도 시간이 될 때마다 일선 부대에 들러 일일이 병사들의 이름과 고향을 물으며 이야기를 나눴을 만큼 부하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952년 대선 당시 그와 공화당이 내세웠던 선거 슬로건은 'I like Ike'(나는 아이젠하워가 좋아· 아이크(Ike)는 그의 별명)이었는데요.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아이젠하워의 인기를 전면에 내세운 짧지만 강렬한 문구였습니다.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