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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표 기자
경제신문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뒤 9년간 일하다, 경제/금융 콘텐츠 제작기업 '레드브릭 콘텐츠'를 창업해 3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등 몇 권의 책을 썼습니다. 메일 주소는 sean@outstanding.kr 입니다.
라인야후 사태가 네이버에게 남긴 6가지 상처들
지난 5월 거세게 불타올랐던 라인야후 사태가 일단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는데요. 네이버, 일본 정부, 소프트뱅크, 라인야후 모두 당분간 라인야후의 지배 구조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내비쳤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1일은 라인야후가 일본 총무성에 행정지도 관련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마감일이었는데요. 보고서 제출 나흘 뒤인 7월 5일 마쓰모토 다케아키 일본 총무상은 다음과 같이 공식 발표했습니다. "행정지도가 이뤄졌던 각 사항에서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대응 내용이 제시돼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라인야후에 대한 자본관계 재검토 요구를 사실상 철회한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발언입니다. 사태 발발 직후 A홀딩스 지분 매입을 추진했던 소프트뱅크 역시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지난 16일 일본 아사히 신문은 소프트뱅크가 라인야후 자본관계 재검토를 단기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지금은 움직일 수 없다"라는 소프트뱅크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요.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한국 정치권과 네이버 노동조합의 강력한 반발이 소프트뱅크의 지분 매입 시도를 멈춰 세운 요인이었는데요. 일본 정부 또한 라인야후 이슈가 한일 양국 간의 첨예한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게 아사히신문의 설명입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 역시 지난 2일 국회에서 "단기적으로 라인 관련 지분 매각은 안 하겠다"고 설명했습니다. "중·장기적 전략 결정은 확답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단서를 덧붙이면서 말이죠. 이처럼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입을 모아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라인야후의 지배구조에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번 라인야후 사태는 네이버 비즈니스 모델의 취약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네이버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번 라인야후 사태가 네이버에게 남긴 6가지 상처들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추락하는 엔씨소프트, 사모펀드의 전설이 반등시킬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엔씨소프트에서 박병무 전 VIG파트너스 대표를 공동대표로 내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업계에서는 엔씨소프트가 위기 극복을 위해 M&A(인수합병) 전문가를 '깜짝 영입'했다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엔씨소프트가 매출 저하와 성장 장재력 감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M&A에 주력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었죠. 김택진 창업자는 게임 개발과 일상적인 경영을 맡고, 박 대표는 기업 인수합병을 주도하는 방식으로요. 하지만 엔씨소프트 내부 사정과 IB(투자은행)업계 속사정에 정통한 이들은 박 대표의 내정이 '깜짝 영입'이라는 데도, 박 대표가 주로 M&A에만 집중할 것이라는 데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엔씨소프트의 상황을 매우 잘 꿰고 있는 박 대표가 M&A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구조조정, 게임 개발 등 엔씨소프트의 전 경영 영역에서 김택진 창업자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상했죠. 무늬만 공동대표가 아니라 실제로 힘을 가진 공동대표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는데요. 2007년부터 시작해 18년간 엔씨소프트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회사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데다, 박 대표 자체가 하나로텔레콤(현 SK브로드밴드),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등 비(非)금융회사의 경영을 이끌며 회사의 실적을 개선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테크업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요. 지금부터는 박 대표는 어떤 인물이고, 그동안 어떤 전략을 바탕으로 어떤 기업들을 경영해 왔는지, 그리고 그가 취임 이후 엔씨소프트를 어떻게 바꿔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택진 창업자와 박병무 대표가 서로를 깊이 신뢰하게 만들어준 결정적인 계기로 알려진 일화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매출 31%, 영업이익 75% 급감한 엔씨 투자업계에서 매우 굵직굵직한 성과를 거둔 인물이지만 박 대표를 투자자로만 바라보면 그가 엔씨소프트에서 펼치려 하는 큰 그림의 절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는데요.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박병무를 이해해야만 엔씨소프트의 미래를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엔씨소프트가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되는 건 1997년 설립 이후 처음인데요. 2024년 3월 전까지는 27년 동안 계속해서 김택진 창업자 단독대표 체제로 운영돼 왔죠. 오너 CEO인 김택진 창업자가 자신의 '왕좌'를 다른 누군가와 나누기로 결심한 건 그만큼 엔씨소프트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인데요.
벤처 투자 실패로 문책성 인사 이어진 SK그룹..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SK그룹이 최근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 (리밸런싱)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계열사 수가 재계 1위인 삼성그룹(63개)보다 3.5배나 많은 219곳에 달하는 등 그동안 그룹이 지나치게 방만하게 운영돼 왔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죠. 그룹 에너지 분야 중간지주사인 SK이노베이션과 발전기업인 SK E&S를 합병하는 방안이 추진된 것도 이 같은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의 일환이고요. 조직에 대한 구조조정과 함께 실패한 IT·벤처 투자, 불발된 포트폴리오 기업 매각 등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경질성 인사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저금리로 인해 IT·벤처기업들의 기업가치가 높이 솟구쳤었던 2020년~2022년 사이에 이뤄졌던 투자들 중 상당수가 실패한 투자로 귀결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장 잠재력 혹은 다른 계열사와의 시너지 효과가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피투자 기업들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매각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요. 이번 기사에서는 SK그룹의 그동안의 IT·벤처 투자 실적에 대해 살펴본 뒤 SK그룹이 어떤 기업들을 M&A시장에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SK스퀘어 대표의 갑작스러운 교체 SK스퀘어는 반도체와 ICT(정보통신기술) 산업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SK그룹의 투자 전문회사인데요. 2021년 11월 SK텔레콤으로부터 인적분할되면서 설립된 회사입니다. 그룹의 투자 분야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는 회사죠. SK하이닉스 지분 20.1%를 보유하고 있고요. 이외에도 SK플래닛(86.3%), 11번가(80.3%), 티맵모빌리티(60.1%), 콘텐츠웨이브(36.7%), 원스토어(46.4%),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32.3%), 스파크플러스(19.1%) 등의 지분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23년 말 기준) 그리고 SK스퀘어는 지난 3일 자사 한명진 투자지원센터장을 새롭게 신임 사장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는데요. 한 사장은 오는 8월 14일로 예정된 임시주주총회와 이사회를 거쳐 사내이사와 대표이사로 공식 선출될 예정입니다. 한 사장은 SK텔레콤에서 최고전략책임자(CSO), 이동통신사업(MNO) 마케팅그룹장, 글로벌 얼라이언스 실장, 글로벌 사업개발본부장 등의 주요 보직을 역임했는데요.
스타트업이 크면 언제 공정위 레이더에 잡히나 (feat. 네이버, 카카오, 쿠팡)
공정위(공정거래위원회)를 부르는 별칭은 '경제 검찰', '재계의 저승사자'인데요. 이처럼 공정위는 독점 및 과점, 불공정 거래와 같은 특정 경제 범죄에 있어서는 경찰과 검찰을 능가하는 조사·처벌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기관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기업에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고, 공정거래법위반 사건에 대해서는 공정위의 전원회의가 사실상 법원 1심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공정위가 감사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과 함께 5대 사정기관으로 불리는 이유죠. 공정위가 매년 심사·지정하는 '대규모 기업집단' 리스트에 이름이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기업과 총수 일가에게 적용되는 책임과 의무가 상당 부분 달라지게 되는 것도 기업들이 공정위를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요. 공정위는 지난 6월 쿠팡에 1400억원의 과징금(잠정) 처분을 내리며 다시 한번 존재감을 강렬하게 드러냈는데요. 회사가 직접 제작한 PB상품을 검색 결과 상단에 노출하기 위해 쿠팡이 검색 알고리즘을 조작했고, 쿠팡 임직원 평가단이 조작된 후기를 남겼다는 게 그 이유였죠. 1400억원의 과징금은 2023년에 쿠팡이 벌어들인 영업이익 6174억원의 4분의 1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 같은 공정위의 조치에 대해 쿠팡은 강하게 반발하며 처분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예고한 상태인데요. 사실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쿠팡은 설립 초기부터 공정위와 숱한 갈등을 벌이면서 성장해 온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랫폼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네이버, 카카오, 쿠팡과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설립 이후 어느 시점부터, 무슨 사유들로 공정위에게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텐데요. 사실 어떻게 보면 플랫폼 기업에게 공정위와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말씀드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독점'을 추구하는 플랫폼과 독과점에 대한 예방과 처벌을 조직의 존립 기반으로 하는 공정위는 애초부터 서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이번 기사를 준비하면서 공정위와 국세청 등 사정기관에게 호된 조사·수사를 받은 기업들을 관통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①내수 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내수 기업이 높은 시장 점유율만 믿고 과도한 수익화를 추진하고, ②이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시작하면 ③반드시 공정위와 국세청 같은 사정기관에 불려 가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컴포즈커피 엑싯에서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 4가지
컴포즈커피는 국내에서 2612개점 (2024년 6월 기준)의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저가 커피 브랜드인데요. 메가커피(3083개점), 빽다방(1615개점)과 함께 저가 커피 프랜차이즈 업계를 삼분하고 있는 회사라고 말할 수 있죠. 컴포즈커피는 최근 몇 년 동안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는데요. 2021년에 1285개점이었던 가맹점 수는 2022년 1901개점, 2023년 2350개점으로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3년 만에 가맹점 수가 2배가 된 것이죠. 지난해에는 매출 889억원, 영업이익 367억원이라는 매우 양호한 실적을 거뒀는데요. 영업이익률이 41.28%에 달합니다. 그리고 최근 IB(투자은행)업계와 외신을 통해 컴포즈커피와 관련된 흥미로운 뉴스가 전해졌는데요. 이 회사의 지분 100%가 필리핀 최대 외식기업과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에 약 4700억원에 매각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컴포즈커피는 불과 2년 전인 2022년에도 매각을 추진한 적이 있었는데요. 당시 회사 측이 원했던 매각가는 약 2500억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원매자와의 협상이 불발되며 매각이 이뤄지지 못 했죠. 2500억원의 기업가치에도 매각이 성사되지 못 했던 회사가 불과 2년 만에 2배에 가까운 가격으로 매각됐다는 사실은 IB업계와 프랜차이즈업계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4700억원의 매각가는 2021년에 매각됐던 경쟁사 메가커피의 매각가 1400억원보다 3배 이상 높은 금액입니다. 물론 3년 전 가격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힘든 부분이 있긴 하지만요. 이번 글에서는 ①컴포즈커피를 인수한 필리핀 프랜차이즈 대기업 졸리비 푸즈와 사모펀드 운용사 엘리베이션에쿼티파트너스는 각각 어떤 회사들인지
8천억대 스타트업 펀드는 어느 VC를 통해 투자되나? ‘셀프 선발’ 우려에 대한 답변
최근 국내 벤처투자업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 (공식 명칭 '창업기업 코리아 기금')에 쏠려 있는데요. 정부(모태펀드)와 민간기업 20곳이 함께 출자한 5853억원을 운용할 벤처캐피탈(VC)들을 선정하는 작업이 지난달 말부터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민간기업이 출자한 약 6000억원에 VC들이 따로 모아 온 출자금까지 더해 합산 8000여억원의 자금을 국내 스타트업들에 투자하겠다는 게 주무 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가 그리는 큰 그림입니다. 정부가 출자금을 대는 스타트업 분야 펀드는 기존에도 활발히 운영돼 왔는데요. 하지만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는 기존 펀드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점을 갖는다는 게 중기부와 업계의 설명입니다. 가장 큰 차별점으로는 민간기업들이 모태펀드(정부 출자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출자한다는 점입니다. 중기부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벤처투자를 통해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에 출자하는 모태펀드 금액은 2423억원인데요. 민간기업 20곳의 출자액은 3430억원입니다. VC들이 모아 올 민간 출자금은 약 2200억원으로 예상되고요. 민간 출자액이 더 많은 특별한 펀드입니다 보통 모태펀드 출자 사업의 경우 정부가 출자금의 60%가량을 부담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에는 민간의 투자 비중이 훨씬 더 높죠. 이처럼 정부는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를 민간기업의 벤처투자를 크게 늘리는 도약대로 삼으려 하고 있는데요.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출자금을 대는 기업들에게도 상당히 큰 인센티브를 제공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①스타트업 코리아 펀드는 어떤 펀드이고, ②어떤 기업들이 왜 이곳에 돈을 댔는지, ③그리고 이 돈을 운용하겠다고 신청서를 낸 VC들은 어떤 곳들인지, ④8000억원의 출자금은 어느 분야에 투자될 예정인지 등에 대해서 하나씩 설명드리겠습니다. VC 선정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업계 일각에서는 '펀드에 돈을 댄 민간기업들이 본인들과 특수관계에 있는 VC들에게 출자금을 몰아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인데요. 이 같은 걱정에 대한 중기부의 답변과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카카오뱅크가 케이뱅크 상장에 걸림돌이 되는 이유
국내 최초 인터넷은행인 케이뱅크가 코스피 상장 추진에 재시동을 걸었는데요. 지난해 2월 상장을 자진 철회한 지 약 1년반만입니다. 금융업계에서는 케이뱅크가 조만간 한국거래소에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요.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케이뱅크는 연내에 코스피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케이뱅크가 지난해에 상장을 철회했던 건 시장에서 원하는 몸값(기업가치)을 인정받기가 힘들다고 판단해서였는데요. 하지만 업계에는 이번에도 케이뱅크가 본인들이 원하는 만큼의 기업가치로 평가받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급락한 카카오뱅크 주가 때문인데요. 카카오뱅크 주가가 케이뱅크를 짓누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①카카오뱅크 주가가 케이뱅크의 상장과 기업가치 평가에 미치는 영향 ②카카오뱅크 주가가 급락한 이유 ③케이뱅크가 2026년 7월까지는 꼭 코스피에 상장해야 하는 이유 ④케이뱅크가 갖고 있는 7000여억원의 돈이 금융당국으로부터 '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해, 대출에 활용되지 못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위 쟁탈전 벌이는 케이뱅크와 토스뱅크 그럼 먼저 현재 국내 인터넷은행 업계의 현황에 대해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다 알고 계신 것처럼 한국에는 케이뱅크, 카카오뱅크, 토스뱅크 이렇게 3개 인터넷은행이 있는데요. 현재 상황은 1강 2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카카오뱅크가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2위 자리를 놓고 케이뱅크와 토스뱅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죠. 은행의 규모를 평가하기 위해 가장 널리 쓰이는 지표는 수신잔액 (은행이 예금자들로부터 받은 돈)과 여신잔액(은행이 대출자들에게 빌려준 돈)인데요. 지난 1분기 기준 카카오뱅크의 수신잔액은 53조원이고, 토스뱅크는 28조3000억원, 케이뱅크는 23조9700억원입니다. 여신잔액 기준으로는 카카오뱅크가 41조3000억원, 케이뱅크가 14조7600억원, 토스뱅크가 13조8500억원이었습니다.
원천기술 없지 않나요? 뤼튼을 향한 의구심 4가지와 그 답변들
최근 IT·스타트업업계에서는 뤼튼테크놀로지스의 투자 유치 소식이 화제가 됐는데요. 뤼튼테크놀로지스는 AI 검색 포털 뤼튼을 운영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프리 시리즈 B(Pre-Series B)로 분류되는 이번 투자 유치를 통해 뤼튼은 250억원을 손에 쥐게 됐는데요. 이번 투자는 미국계 벤처캐피탈인 BRV캐피탈매니지먼트가 중심이 돼 이뤄졌습니다. 일본 라인야후(LY코퍼레이션) 소속 VC인 Z벤처캐피탈도 이번 투자에 돈을 댔고요. 이외에도 기존 투자사인 캡스톤파트너스와 IBK기업은행도 계속해서 투자에 참여했죠. 지난해 6월 15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한 지 딱 1년 만에 250억원의 투자금을 추가로 모으면서 뤼튼의 누적 투자 유치액은 440억원으로 늘어났는데요. 벤처투자업계가 전반적인 침체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한국뿐 아니라 해외 유력 VC들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을 잇달아 유치했기에 이번 투자 유치 소식은 업계에서 화제가 됐죠. 2021년에 설립된 뤼튼은 지난 3년간 매우 빠른 성장의 발걸음을 걸어왔는데요. 설립 초기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글쓰기 보조 솔루션, 비즈니스 문서 초안 작성, AI 이미지 생성 서비스 등을 주력 서비스로 제공했지만 최근 1년간은 'AI 검색' 시장을 개척하고, 서비스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AI 시대의 새로운 검색 포털이 되겠다', '생성형 AI 시장에서 메가 플랫폼이 되겠다'는 게 뤼튼의 목표죠. (참조 - 3주 만에 2만명 가입한 글쓰기 AI '뤼튼'.. 이세영 대표 인터뷰) GPT, 클로드 등 무료, 무제한으로 제공합니다 뤼튼이 제공하는 AI 검색은 다른 회사들이 개발한 여러 LLM(거대언어모델)을 동시에 활용·조합함으로써 이용자의 질문 의도에 맞는 결과를 보여주는 생성형 검색 서비스입니다. 뤼튼을 방문하면 오픈 AI의 GPT 모델, 앤트로픽의 클로드 모델 등의 여러 LLM을 바탕으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데요. 이용자는 어떤 AI 모델을 사용해 검색할지를 본인이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뤼튼이 제안해준 AI 모델대로 검색을 진행할 수도 있는데요.
컬리 흑자 냈는데.. 최대주주 앵커PE는 한국 철수설까지 도는 이유
2024년 3월 기준 컬리의 최대주주는 홍콩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앵커에쿼티파트너스(앵커PE)인데요. 컬리 주식의 13.5%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컬리는 지난 1분기에 창립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분기 흑자를 달성했는데요. 매출 5381억원에 영업이익 5억원을 기록했죠. 비록 영업이익률은 0.1%에 불과하지만 매 분기 이어지던 수백억원대의 적자 행진을 드디어 흑자로 돌려세웠다는 점에서 업계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죠. 매출은 1년 전(5299억원)과 비교해 5.8% 늘어나며 분기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영업이익 역시 314억원 증가했으니까요. 컬리의 실적이 공개되자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컬리가 상장 재추진에 시동을 걸 시점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참조 - 최대 실적 낸 컬리·오아시스, 다시 상장한다 말할까) 하지만 이 같은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최대주주 앵커PE는 웃지 못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앵커PE는 애초에 본인이 원해서 컬리의 최대주주가 됐던 건 아닌데요. IB업계 일각에선 지난 10여년간 한국을 주무대로 활동해 왔던 앵커PE가 한국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참조 - 1호 펀드 청산 앞둔 '앵커에쿼티', 실무진 대거 이탈) (참조 - '투썸플레이스 신화' 앵커에퀴티, 韓서 철수하나) 앵커에쿼티파트너스는 그동안 컬리뿐 아니라 두나무, 라인게임즈, 카카오엔터테인먼트, 프레시지, 이투스, 메타엠, 투썸플레이스 등 국내 주요 유망기업에 투자해 왔는데요. 최근엔 신규 투자를 중단한 채 투자 포트폴리오의 상당수를 매물로 내놓은 상황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때 해외 LP(출자자)들 사이에서 한국 시장을 가장 잘 아는 운용사로 불렸던 앵커PE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와 이 같은 최대주주의 사정이 컬리의 앞으로의 상장 계획에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외국 출자자들의 돈으로만 운용되는 사모펀드 앵커에쿼티파트너스의 곤경은 2021년~2022년 사이에 단행한 각각 수천억원대의 대규모 투자들로부터 비롯됐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분석인데요. 과연 이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토스 41배, 배민 28배, 원티드 15배.. 압도적인 성과를 거둔 펀드가 있습니다
최근 벤처투자업계에서는 우리금융지주 산하 VC(벤처캐피탈)인 우리벤처파트너스가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이 회사가 지난 5월에 청산한 'KTBN 7호 벤처투자조합' 펀드가 압도적인 성과를 기록하며 10년 간의 여정을 마무리했기 때문이죠. 이 펀드는 2014년에 만들어졌는데요. 이 펀드가 투자한 스타트업들 중 투자 원금 대비 1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기업은 4곳에 달합니다. 먼저 토스 운영사 비바리퍼블리카에 투자해 원금의 40.9배에 달하는 수익을 회수했고요.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에서는 27.8배의 수익을 거뒀습니다. 셀리드에서는 18.2배, 원티드랩에서는 15.4배를 벌어들였죠. KTBN 7호 펀드의 투자 이후 유니콘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의 자리에 오른 기업은 6곳에 달했는데요. 국내 기업 중에서는 비바리퍼블리카, 우아한형제들, 휴젤이 유니콘의 뿔을 달았습니다. 미국의 오리스헬스, 중국의 칼스젠, 인도의 노브로커 역시 유니콘으로 등극했고요. 지난 10년간 7호 펀드가 투자했던 기업은 모두 32곳이었는데요. 평균 수익률은 순연환산 내부수익률(Net IRR) 기준 연 29.2%를 기록했습니다. 682억원의 투자 원금(약정 총액)으로 결성된 이 펀드가 그동안 투자자들에게 배분한 금액은 2791억원에 달하죠. 전체적으로 원금의 4배에 달하는 수익을 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Net IRR(순 연환산 내부수익률) 펀드가 벌어들인 전체 수익에서 펀드 운용사가 가져가는 성과 보수와 운용 수수료 등을 제외한, 투자자가 실제로 받아가는 수익만을 기준으로 하는 내부수익률 기준. 이와 반대로 투자한 자산에서 펀드가 수령한 전체 수익을 기준으로 집계하는 수익률은 Gross IRR(총 연환산 내부수익률)이라고 함.
회사가 직원의 메신저와 카톡을 봐도 괜찮나
"내가 다른 동료들과 나눴던 메신저 대화를 회사 측에서 확인할 수 있냐고 묻는 CS(고객서비스) 문의가 5배 넘게 늘어났습니다" (업무용 협업툴 업체 관계자) 최근엔 회사가 직원들의 업무용 메신저·메일 대화 내용 등을 언제, 얼마까지 확인·감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직장인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는데요. 여러 이슈에서 업무용 메신저가 계속해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죠. 보듬컴퍼니 이슈에서는 강형욱 대표의 아내이자 회사 이사인 수잔 엘더 이사가 직원들이 업무용 협업툴 네이버웍스에서 나눈 6개월치 대화 내용을 '충분한 동의'를 받지 않고 열람했다는 점이 문제가 됐고요.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 사이의 갈등은 하이브가 감사 과정에서 민 대표의 업무용 컴퓨터에서 발견한 카카오톡 대화 내역이 하나의 계기가 됐죠. 엄밀히 말해 업무용 메신저는 아니지만 회사 소유 컴퓨터를 통해 이뤄진 메신저 대화 내역이라 감사의 대상이 됐죠. 최근에는 영업기밀과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사내 메일에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한 기업들도 적지 않고, 보안과 범죄 예방을 위해 회사 사옥 여기저기에 CCTV를 설치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회사가 업무용 메신저·메일,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대화 내역 등의 정보를 언제, 어느 범위까지 확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직원들의 동의를 받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와 근로자의 동의 없이도 확인하는 게 용인되는 긴급한 경우에 대해 나눠서 알아보겠습니다. 네이버웍스, 슬랙, 잔디 등 주요 업무용 협업툴별로 사측에 메시지 확인·감사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서비스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를 알아본 뒤 각각의 권한 부여 요건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의 받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업무용 메신저·메일은 기본적으로 회사 소유 자산이고 업무 수행을 위해 직원들에게 지급된 도구이기 때문에 회사 역시 해당 서비스에 저장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인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회사가 언제든, 아무런 제한 없이 직원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정보보호법 등 관련 법률에 따라 직원들이 업무용 메신저에서 나눈 대화 역시 직원들의 개인정보로 인정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측이 업무용 메신저와 메일의 대화 내역 등을 확인·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보 주체인 해당 직원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동의'란 단순히 '업무용 메신저·메일을 회사 측이 확인할 수 있다. 동의하느냐?'라고 물은 뒤 '괜찮다'는 답변을 듣는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동의를 얻을 때는 사측이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목적, 이용 방법, 수집 항목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돼야 한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입니다. 정보를 수집할 때도 업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항목만을 최소한으로 수집해야만 하고요.
앞으로 15배 넘게 성장할 테이블오더 시장, 누가 평정할까?
최근엔 테이블 위에 메뉴판과 호출 버튼 대신 태블릿을 설치해 놓은 식당과 주점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옆에 카드 결제기도 달려 있어 손님은 메뉴를 주문함과 동시에 결제도 할 수 있죠. 물, 주류, 접시 등 필요한 항목을 선택한 뒤 종업원을 호출할 수도 있고요. 이 같은 시스템을 외식업계에선 '테이블 오더(Table Order)'라고 부르는데요. 최근엔 이 테이블오더 시장이 투자업계와 IT·통신기업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수백억원대의 투자금 유치를 바탕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기업도 생겨났고, 대기업과 빅테크들도 이 시장에 속속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장에 돈과 관심이 몰리는 이유는 그만큼 성장성이 크기 때문인데요.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에는 79만5488곳의 음식점, 주점, 카페가 영업 중입니다. 그리고 외식업체들 중 테이블오더와 키오스크 같은 무인 주문기를 도입한 업체의 비중은 6.1%(2022년 기준·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불과하죠. 외식업체 도입률이 91.4%에 달하는 포스단말기(POS)와 비교하면 아직은 보급이 극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포스단말기 만큼 보급된다면? 신기술 도입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외식업계이지만 일단 한번 효과가 검증되고 나면 빠른 속도로 보급이 이뤄지는데요. 2017년에 55.8%에 불과했던 포스단말기 도입 비율이 5년 만에 90%를 넘어섰다는 사실이 이 같은 점을 잘 보여주죠.
리멤버 이어 숨고 인수 추진, 아크PE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최근엔 벤처투자업계에서 아크앤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PEF) 운용사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데요. 올해로 설립 4년차를 맞는 비교적 신생 운용사의 이름이 업계에서 널리 거론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곳이 투자한 회사들이 맹렬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이 회사의 첫 번째 투자처는 1600억원을 투자한 채용·비즈니스 플랫폼 리멤버인데요. 투자 당시 58억원(2021년)에 그쳤던 리멤버의 연 매출은 2023년 396억원으로 2년 만에 7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두 번째 투자처인 스트리트 패션 편집샵 카시나 역시 투자 이후 2년 만에 매출은 86% 늘어났고, 영업이익은 450% 급증했죠. 아크앤파트너스는 최근 서비스 중개 플랫폼 숨고에 대한 투자도 추진 중인데요. 60%가량의 지분을 약 800억원에 인수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거래가 성사되면 아크앤파트너스가 숨고의 경영권을 갖게 되죠. 높은 성과의 비결은? 이처럼 피투자 기업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는 건 단순히 아크앤파트너스가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을 고르는 좋은 선구안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데요. 그보다는 아크앤파트너스의 전략과 지원이 피투자 기업의 성장점을 적절히 자극함으로써 빠른 성장을 이끌어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피투자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맞춤형 컨설팅 조직인 밸류크리에이션그룹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고, 자사 임원을 피투자 스타트업의 전략담당 임원으로 파견해 성장 전략을 직접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 회사는 국내 벤처투자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로스 바이아웃' 전략을 바탕으로 스타트업들에 투자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아크앤파트너스가 리멤버 등 피투자 기업들의 성장을 이끌어낸 구체적인 전략과 이 같은 전략이 다른 스타트업들과 벤처투자업계에 주는 시사점, 숨고 인수 이후의 전망 등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인야후 사태 예상 시나리오 4가지! 처음부터 손해 보는 장사였나?
라인야후 지분을 둘러싼 네이버와 소프트뱅크의 협상이 물밑에서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현시점에서 예상 가능한 4가지 시나리오와 각각의 상황별로 네이버가 얻는 것과 잃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라인야후 사태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사가 합병을 결정하게 된 배경과 현재의 정확한 지배 구조(우호 지분 포함), 라인야후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네이버의 해외 진출 전략에 대해 먼저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지분 매각에 무게 실린 이유 사태 초기만 하더라도 네이버의 라인야후 지분 매각 여부를 놓고 '팔 것이다'와 '안 팔 것이다'라는 예측이 팽팽하게 맞섰는데요. 현재로선 매각 가능성에 좀 더 무게가 실린 모양새입니다. 지난 5월 14일에 있었던 라인플러스 직원 설명회가 계기가 됐는데요. 라인플러스는 라인야후의 한국법인 자회사입니다. 라인플러스, 라인파이낸셜, 라인넥스트 등 라인야후의 한국 자회사들에는 2500여명의 한국인 직원들이 일하고 있죠. 라인야후 사태가 불거지면서 직원들 사이에선 고용 불안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데요. 소프트뱅크가 라인야후의 경영권을 확보하게 되면 한국 자회사의 역할을 축소할 수도 있고,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14일 설명회는 직원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됐는데요. 이데자와 다케시 라인야후 CEO는 이 자리에서 "한국 직원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겠다. 변화는 없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은정 라인플러스 대표 역시 "한국 직원들이 걱정하는 차별은 결코 없을 것" 이라며 "불합리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고요. 직원들에 대한 고용 보장은 인수 협상이 일정 궤도에 올랐을 때 이뤄지는 게 보통인데요. 지분 인수·매각 여부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전문 경영인 나서서 '최대 주주가 바뀌더라도 고용을 계속해서 보장하겠다'고 확약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이 같은 이유로 IT업계에서는 두 회사 사이의 협상이 네이버의 지분 매각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는데요.
1200만명 세금환급 시장.. 토스, 카뱅, 핀다가 삼쩜삼에 도전장 내민 3가지 이유
종합소득세를 신고·납부해야 하는 인원이 몇 년 사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관련 시장도 함께 성장하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토스, 카카오뱅크, 핀다와 같은 핀테크 기업들도 새롭게 택스테크(Tax + Technology) 시장에 속속 진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5월 종합소득세 신고 시즌에는 이 같은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인터넷은행, 대출 중개 플랫폼 등 기존의 핀테크 기업들이 세금 환급 시장에 진출하는 이유와 각 기업들이 신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전략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4년 사이 337만명 늘어난 종소세 대상자 종소세는 근로·사업·이자·배당·연금·기타소득이 있는 납세자가 신고·납부하는 세금인데요. 매년 5월에 지난해 1년 치 소득에 대한 종합소득세를 신고·납부받고 있습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개인사업자(자영업자)와 월급 외에 사업소득 등이 있는 직장인이 내야 하는 세금이죠. 법인이 법인세를 내는 것처럼 개인사업자는 종소세를 내야만 합니다. 금융(이자·배당)소득이나 기타소득이 일정 금액 이상인 납세자도 종소세 과세 대상이고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종소세를 신고하는 인원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는데요. 국세청에 따르면 2018년 691만명이었던 종소세 확정신고 인원은 2022년에 1028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4년 사이에 신고 인원이 48.7%, 337만명이나 급증한 것이죠. 같은 기간 연말정산을 하는 근로자 수는 10.4% 증가하는 데 그쳤는데 말이죠. 2024년에도 종소세 대상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국세청에서 올해 종소세 안내문을 1255만명에게 발송했기 때문입니다. 종소세 대상자들이 늘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텐데요. 여기서는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창업에 나서는 자영업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N잡러와 프리랜서 역시 증가하고 있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습니다. 신청해야만 돌려주는 종소세 환급금 이처럼 종합소득세를 신고·납부해야 하는 인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연관 시장의 규모도 팽창하고 있는데요.
상표권을 매각하며 배운 스타트업 상표 등록의 원칙 3가지
상표권을 매각해 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얼마 전 아웃스탠딩에 합류한 홍선표 기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 경험을 바탕으로 초기 스타트업, 1인 기업, 자영업자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상표권 등록의 원칙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전문 특허 용어와 이론을 말씀드리기보다는 제 경험과 이를 통해 제가 배울 수 있었던 점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웃스탠딩에 입사하기 전 3년 동안 저는 콘텐츠 제작기업을 운영했었는데요. 주로 경제·금융 분야 콘텐츠를 제작해 클라이언트사에 납품하는 회사였죠. 그 이전 9년 동안 경제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던 창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체를 운영하던 시기에 저는 제 회사의 상표권을 다른 기업에 매각했는데요. 상대 회사가 제 회사의 상표권을 돈을 주고 인수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상대 회사를 고려해 상표명과 등록 업종, 매각금액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히 설명드리지 못 하는 점 먼저 양해 부탁드립니다. 상표권 침해를 발견하다 상표권 등록과 사업자등록을 정상적으로 마친 뒤 사업체를 열심히 일궈나가던 저는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제가 등록한 상표명과 동일한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하는 회사가, 제 회사가 활동하는 업종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상표 등록을 진행해 주신 변리사님께 확인을 요청하니 해당 이름으로 ①상표권 등록을 한 것도 제가 먼저였고, ②사업자등록을 한 것도 제가 먼저였습니다. 또한 ③저는 상표권을 등록한 업종 (상품분류, 유사군코드)에서 해당 브랜드로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고요. 상표를 실제로 활발히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죠. 변리사님께서는 이런 이유들로 인해 해당 상표에 대한 권리는 온전히 저에게 있으며, 제 상표권을 침해하고 있는 상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치를 취할 것을 조언하셨는데요.
일본은 왜 라인야후의 지배구조를 바꾸려 할까? 10가지 질문들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서 촉발된 라인야후 사태가 한 기업을 넘어 한일 양국 간의 심각한 외교문제로까지 커져가고 있는데요.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라인야후 이용자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거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대부분 다른 데이터 유출 사건들과 비슷하게 회사에서 과징금을 내고, 담당 부처에 보완 대책을 제출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사건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라인야후 CEO가 공개석상에서 "네이버에 자본의 변경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발언할 정도로 커져버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라인야후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꼭 짚어봐야 하는 내용들을 10가지 질문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이번 사태는 왜 벌어졌나? 이번 사태는 지난 3월(1차)과 4월(2차)에 연달아 실시된 일본 총무성의 라인야후에 대한 행정지도에서 촉발됐는데요. 총무성은 일본에서 인터넷, 통신, 방송 분야를 담당하는 부처입니다. 3월에 있었던 1차 행정지도에서 일본 총무성은 라인야후에게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는데요. 라인야후와 네이버의 시스템을 분리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네이버와의 자본 관계를 재검토'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사실상 네이버가 갖고 있는 라인야후 지분을 소프트뱅크에 매각하라고 권고한 것이죠. 한 달여 뒤인 4월에는 다시 2차 행정지도에 나섰는데요. 1차 행정지도 이후 라인야후가 제출한 보고서에 구체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습니다. 지난해 11월에 드러난 라인야후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강도 높은 행정지도의 계기가 됐는데요. 해킹으로 인해 약 51만건의 이용자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입니다. 일본 정부가 특히나 문제 삼았던 점은 해킹이 라인야후의 중요 서버를 위탁관리하는 네이버클라우드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난해 9, 10월 네이버클라우드 협력사 직원의 PC가 악성 코드에 감염됐고, 해커는 이를 이용해 네이버클라우드의 내부 시스템에 접근했습니다. 라인야후가 이용자 정보를 네이버클라우드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해커는 이곳을 통해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빼내갈 수 있었고요. 2. 일본 정부는 왜 이례적으로 행동했나? 라인야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잇달은 행정지도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이처럼 전례 없는 수준의 행정지도에 나선 것은 라인야후와 네이버의 특수한 관계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행정지도 과정에서 '라인야후가 시스템 업무를 위탁한 네이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바람에 사이버 보안 대책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았다'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습니다. 그동안 라인야후는 시스템 개발·운영·보수 업무의 상당 부분을 네이버에 위탁해 왔는데요.
전설의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배우는 혁신의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업종에서 활동했든지와 상관없이 후발 주자로 시작해 단기간에 압도적인 1등의 자리에 오른 기업과 조직에는 분명 커다란 배울 점이 있는데요. 오늘 말씀드릴 잡지 '뿌리깊은 나무'도 그렇습니다. 이 잡지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발간됐던 교양 월간지인데요. 1980년 8월 신군부(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군부세력)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인해 폐간될 당시의 발행 부수는 8만여부에 달했습니다. 4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잡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죠. 흥미 위주의 내용을 다루는 대중지도 아닌 교양지가 말이죠. 이번 글에서는 '뿌리깊은 나무'를 단기간에 당대 최고의 미디어로 만들었던 3가지 비결에 대해서 알아볼 텐데요. 40년도 더 전에 발간됐던 잡지의 성공 비결에 대해서 소개드리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뿌리깊은 나무'야말로 당시 언론‧출판업계의 온갖 구태의연한 관행과 철옹성 같던 금기들을 모조리 깨부수면서 혁신을 일궈냈던 잡지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언론‧출판업계 역사상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잡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 '명확한 우선순위에 따른 경영'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잡지를 만든다'는 단순명료한 최우선 목표를 정한 뒤 조직의 모든 역량을 이를 실현하는 데 집중했죠.
최고의 리더를 만든 평범한 멘토들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안녕하세요. 홍선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최고라 불리는 인물들을 만들어낸 멘토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최고의 리더를 만들어낸 평범한 멘토들'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범한 자질이라 해서 꼭 비범한 환경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는 한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가 비범한 인물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평소에 누군가의 일생에 대해 다룬 평전이나 자서전을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요.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은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은 다 똑같은 사람이구나'하는 점입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불굴의 의지로 돌파해온, 마치 강철 심장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들이더라도 사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처받고 아파하는 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게 없구나라는 점을 많이 느끼곤 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번 글 뒷부분에서 소개해드릴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자인데요. 살아있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일본의 경영자이죠. 올해로 연세가 90세이셔서 이제는 사회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시는 분인데요. 1959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7명의 전 직장 동료와 함께 교토의 후미진 철공소 골목 2층에서 창업한 교세라를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적자도 보지 않으면서 임직원 8만여명의 글로벌 전자제품‧부품‧소재 업체로 키워낸 인물이죠. 2010년 일본항공(JAL)이 2조3221억엔(당시 환율 기준 28조5000억원)의 빚을 지고 파산했을 때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무보수 회장직'에 취임해 2년 7개월 만에 회사를 부활시켰죠. 저는 여태껏 이분이 쓰신 책을 10권 이상 읽었는데요.
"홍보색채를 빼야 홍보가 됩니다".. 매출을 올리는 뉴스레터 작성 노하우 4가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안녕하세요. 홍선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전문직과 지식 서비스 분야 개인사업자들을 위한 뉴스레터 작성 노하우 4가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뉴스레터가 지식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시는 개인사업자들에게 저비용 고효율의 영업‧마케팅 툴이 될 수 있는 이유와 매출 증대를 이끄는 구체적인 작성 노하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모든 내용은 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데요. 제가 지금껏 3년 동안 운영해오고 있는 개인 뉴스레터 '홍자병법'이 2021년 6월 제가 콘텐츠 제작‧컨설팅업체 레드브릭을 창업한 이후 저희 회사의 신규 클라이언트 발굴, 프로젝트 수주, 매출 증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 구독자를 어디서 찾나? 뉴스레터 운영을 고민하시는 전문직‧지식 서비스 분야 사업자분들께 제가 드리는 첫 번째 조언은 "구독자를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라. 지금 갖고 있는 명함들이야말로 최고의 구독자 리스트다"입니다. 저는 전문직 분야 사업자분들이나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만나 뵐 때마다 이번 글에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뉴스레터 운영을 시작하실 것을 조언드리는데요. 저의 설명을 들으신 대표님들은 대부분 '뉴스레터를 바로 시작해야겠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곧바로 이어지는 질문이 바로 '그런데 구독자는 어떻게 모아야 하나요?'입니다. 온라인 마케팅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뉴스레터 구독자를 모으려면 마케팅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하시고요.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이 바로 위에서 소개해드린 첫 번째 원칙 '구독자를 멀리서 찾지 마시라'인데요.
남들이 기피하는 자리를 맡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는 기분이고,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다" 1884년 초가을의 어느 날, 미국 노스다코타주 배드랜드의 황막한 평원에 자리 잡은 한 목장으로 20대 중반의 젊은이를 태운 마차 한 대가 들어섭니다. 농촌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정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젊은이였죠. 마차에서 내린 젊은이의 얼굴에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햇볕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듯 창백한 혈색, 깊게 파인 눈두덩이, 비쩍 마른 몸까지 당장이라도 쓰려지려 하는 몸뚱이를 의지만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뉴욕주 주의회 연단에 올라 열변을 토하던 젊은 개혁가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죠. 그해 2월 14일, 주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그가 건강한 딸을 얻었다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됐다는 전보였죠. 하지만 곧이어 날아온 두 번째 전보를 읽는 순간 그는 마치 온몸의 영혼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의사당을 박차고 나가 뉴욕에 있는 집으로 달려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든 그의 아내와 어머니였습니다. "우리 집에 저주가 내린 것 같아.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 형수님도!" 사색이 돼 그를 맞이한 동생의 외침이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몇 시간의 차이를 두고서 각각 싸늘한 육신이 돼버린 어머니와 아내를 끌어안게 됩니다.
"은 총알은 없다".. 최고경영자 3인의 위기돌파 리더십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2010년 2월 1일, 일흔여덟 살의 한 백발 신사가 도쿄 시나가와구에 있는 일본항공(JAL) 본사 1층 로비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날은 JAL이 2조3221억엔 (2010년 환율 기준 약 28조5000억원)의 빚에 짓눌린 채 파산을 선언한 지 2주째 되는 날이었는데요. 전체 직원의 3분의 1에 달하는 1만6000명을 내보내고 남은 직원들의 월급도 20~30%씩 삭감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 방안이 발표됐지만 JAL이 되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공기업 시절부터 수십년 째 누적된 부실 경영의 폐해에다 엔고(일본 엔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현상)까지 겹치면서 회사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죠. JAL 임직원들 중에서도 회사가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죠. 조금 전 JAL 본사 로비로 들어간 남성은 평소 '기내식이 맛이 없고, 서비스도 형편없어서 JAL 비행기는 타지 않는다'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말해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날만큼은 자택이 있는 교토에서 도쿄로 이동할 때 JAL 비행기를 타고 왔죠. 잠시 뒤 본사 건물에서 빠져나온 이 백발 신사는 곧바로 하네다 공항에 있는 JAL 사무소로 향합니다. JAL의 사장을 비롯한 고위 임원들도 그 뒤를 따랐죠. 조금 전 있었던 간소한 취임식을 통해 이 일흔여덟 살 노인이 회사의 새로운 회장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본 정부가 JAL을 부활시키기 위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구원 투수였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오합지졸 독립군'으로 승리를 거둔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우리 군대의 군기 부족은 심각합니다.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는 적 앞에서 이 군대를 새롭게 조련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또 위험합니다" "나의 능력과 군사적 경험으로 이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신임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775년 7월 2일, 미국 대륙회의로부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아 처음으로 대륙군(미국 독립군)과 영국군이 맞서 싸우고 있는 전장에 도착한 조지 워싱턴이 부대를 둘러본 지 일주일 만에 대륙회의 의원인 리처드 헨리 리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는 절망 섞인 문장입니다. 조지 워싱턴,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분이더라도 그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미국, 그리고 세계 역사상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실 텐데요. 1732년 버지니아주의 평범한 농장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토지 측량사로 일하면서 토지 투자로 부를 이뤘고 이후 '프렌치 인디언 전쟁' (오하이오강 주변의 영토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에 영국 측 민병대 지휘관으로 참전합니다. 민병대장직을 사임한 1758년 이후에는 지금으로 치면 재벌집 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여성과의 결혼으로 미국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으로 거듭나죠.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7000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했던 여성과의 결혼이었지만 정략결혼은 아니었고 결혼 생활도 원만했습니다.) 1758년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774년까지 이 16년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치안판사,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을 지냈습니다.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이 시기의 워싱턴은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때 그의 의견이 존중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가 의정을 이끄는 지도자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언제나 관대한 태도로 자신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익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게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였죠.
이순신 장군이 애독한 '오자병법'에 담긴 불패의 비결 3가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죽고자 하며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여덟 글자의 한문을 풀어낸 이 말은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말인데요. 이순신 장군을 다루는 드라마, 영화, 소설, 웹툰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기 때문이죠. 이 말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둔 1597년(정유년) 음력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이 휘하 장수들 앞에서 했었던 말인데요.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한 명의 사나이일지라도 좁은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사나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 각각의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곧바로 군율에 따를 것이다. 조금도 너그러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단 열세 척의 배를 이끌고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나라의 명운을 건 승부를 벌여야 했던 이순신. 그가 여러 부하 장수들 앞에서 이 말을 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같이 말하며 자신이 '필사즉생 생즉필사'라는 말을 병법서에서 가져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셨던 것과는 달리 이 말 자체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말이 아니었죠.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문장뿐 아니라 '한 명의 사나이일지라도 좁은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사나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라는 말도 이 병법서에서 가져와 말하고 있죠.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인생의 가장 고독하고, 필사적인 순간에 떠올린 이 책은 어떤 병법서일까요? 병법의 대명사로 불리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일까요?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스타트업이 살아남기 위한 4가지 조건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제 이름은 폴 개럿이라고 합니다. 저는 제너럴모터스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으며, 저희 회사의 부회장이신 도널드슨 브라운 씨를 대신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부회장님께서는 당신께서 기업의 최고 경영에 관련해서 GM의 정책과 구조를 한번 연구해 볼 의향이 있으신지 알고 싶어하십니다" 1943년 늦은 가을의 어느 날, 미국 베닝턴 대학의 철학 및 정치학 교수였던 34살의 피터 드러커에게 걸려왔던 전화인데요. 그가 전화기를 집어든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경영학의 아버지'이자 경영 컨설턴트로서의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경영학의 아버지'란 호칭은 오직 피터 드러커에게만 허락된 호칭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이처럼 그는 경영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창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죠. 그런데 이 같은 학문적 업적에 조명이 집중되는 탓에 그가 평생에 걸쳐 몸담아온 또 다른 전문직 커리어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요. 그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학자이면서 동시에 경영‧전략 컨설턴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계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사실 피터 드러커야말로 현대적인 경영 컨설턴트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죠. 앞서 소개한 GM의 제안이 그가 수행한 첫 번째 컨설팅 프로젝트였는데요.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년 동안 GM 경영진의 '전폭적인 협조'(피터 드러커의 표현)를 받아가며 회사의 인사 제도와 경영 전략, 판매 정책, 조직문화 등 사실상 GM의 모든 영역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책으로 출간된 그의 '컨설팅 보고서'는 GM의 고위 경영자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GM 내에서는 그의 이름에 대해 언급하는 일 자체가 금기시됐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노무 및 종업원 관계, 본사 스태프의 쓰임새와 역할, 딜러 관계와 같은 GM의 일부 정책들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지 않은가를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GM 경영진들에 대한 불경죄였고, 나는 결코 완전히 용서를 받은 바가 없다"
피터 드러커가 1인 창업자에게 전하는 3가지 조언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루는 책을 읽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요. 이번 글의 시작은 제가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리는 걸로 시작해보겠습니다. 2021년엔 피터 드러커가 쓴 책들을 연달아 읽었는데요. 그의 대표작이자 경영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한 책으로 평가받는 '매니지먼트'부터 시작해서 '프로페셔널의 조건', '변화 리더의 조건', '이노베이터의 조건', '프런티어의 조건' 그리고 '피터 드러커 자서전'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책 6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피터 드러커의 경영 철학과 전략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는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과 '피터 드러커 씨, 1인 창업으로 어떻게 성공하죠?', 두 권도 읽었고요. 단기간에 특정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 것 역시 피터 드러커로부터 배운 학습법인데요.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앞으로 3, 4년간 전념해서 공부할 분야를 정한 뒤 이 기간 동안에는 해당 분야의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독파해나갔습니다. 그는 살면서 약 40권의 책을 남겼는데요. 이중 절반은 우리가 피터 드러커라고 하면 떠올리는 경영학 분야의 책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유럽 중세역사, 일본 미술사에 대한 책들이었습니다. 뚜렷한 학습 목표를 정한 뒤 집중적으로 공부해나갔던 덕분에 이처럼 폭넓은 분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듣보잡 스타트업'이 주목받는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3가지 방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비영리단체든 모든 조직의 의사결정은 글로 확정되고 문서를 바탕으로 실행됩니다. 업계를 뒤흔들어놓을 야심만만한 창업자의 원대한 구상도, 여러 직원들이 수많은 날들을 하얗게 불태우면서 수립한 치밀한 계획도 결국 단어와 문장을 통해 완성되고, 조직 내 구성원들에게 명료하게 전달돼야만 확실한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죠. 글과 문서를 바탕으로 행동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야말로 시스템을 갖춘 조직과 단순한 친목모임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인데요. 글을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는 집단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저 모임일 뿐 조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업이 생산하는 여러 종류의 글들 중에서도 가장 큰 공신력을 지니는 문서는 보도자료와 주주서한, 사업보고서와 같은 IR자료입니다. 회사의 이름을 달고 조직의 활동과 성과, 계획, 목표에 대해 사회 전체(보도자료)와 회사의 주인(IR자료)에게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니까요.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이 내는 보도자료 역시 조직의 주인인 국민에게 자신들의 성과를 '보고'한다는 면에서 그 조직의 가장 공신력 있는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보도자료에는 해당 조직이 달성한 구체적인 성과와 이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이 같은 성과가 조직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담겨 있어야 하는데요.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을 기획할 때는 그 제안서를 언론에 배포하 는 보도자료 형식으로 써서 제출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신규 서비스를 기획하는 아마존 직원들은 해당 서비스의 개발이 완료돼 출시만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한 채 서비스의 기능과 이용자들에게 제공할 혜택을 보도자료 형식으로 정리해 제출해야만 했는데요. 이를 통해 제프 베이조스는 서비스가 완성됐을 때 소비자와 미디어가 그 서비스를 어떻게 평가하길 원하는지, 서비스의 완성된 형태는 무엇이며, 서비스를 개발하려는 목적은 무엇인지를 직원들이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놓은 채 개발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참조 - 아마존의 상징 '6페이지 문서', 어떻게 쓰는지 들여다봤습니다)
'구상은 크게, 시작은 작게' 1인기업이 매출 1.5조 물류기업으로 성장한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84년 9월 1일, 서울 용산구 갈월동 한성빌딩 안에 있는 한 작은 사무실로 반팔 와이셔츠 차림의 30대 중반 남성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들어섭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대우중공업이라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대기업에서 영업과장으로 일했던 남자였지만 이날부터는 책상과 의자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사무실에서 일해야만 했는데요. 이날은 그가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 출근하는 첫 번째 출근날이었습니다. 회사라고 해봤자 직원 한 명 없는 1인 기업이긴 했지만요. 한국물류연구원이라고 새겨진 갈색 나무 간판을 사무실 문 옆에 걸어두고 들어온 남자는 곧장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머릿속 계획을 하나씩 종이에 적어 내려 갔습니다. 1. 회원 모집 2. 물류 연구회 구성 3. 물류 전국대회 개최 4. 물류설명회 및 세미나 개최 마지막 항목인 '12. 국내 물류 실태조사'까지 적는 걸 마친 남자의 얼굴은 설렘과 불안감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습니다. "미래에 도전하기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망설임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35세라는 젊음과 물류에 대한 열정만으로 인생의 모험을 걸기에는 한 여인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현실적인 문제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하여 무려 3년여에 걸쳐 고민하였고, 결심을 하고서도 사직서를 작성하여 품에 넣고 다니면서 다시 1년 정도를 망설였다" 그리고 첫 출근날로부터 정확히 34년 2개월이 지난 2018년 11월 1일, 이날 서울 중구 소공동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는 '제26회 물류의 날'을 기념하는 한국물류대상 시상식이 개최됐는데요. 물류 기업인들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영예인 '은탑산업훈장'을 시상할 순서가 되자 회의장 앞에 마련된 단상으로 이제 막 일흔 살에 접어든 34년 전의 그 남자가 올라섭니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용산구 갈월동의 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시작한 1인 기업이 어느새 연 매출 1조 5000억원의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던 것이죠. 대체 이 30여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기업 뉴스룸' 담당자를 위한 콘텐츠 제작 노하우 3가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자체 제작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는 일이 일상화됐는데요. 작은 스타트업이더라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공식 SNS 채널을 운영하는 건 기본이고, 홈페이지‧블로그‧뉴스레터‧유튜브 등을 통해 정기적으로 높은 퀄리티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모습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큰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자신들에 대해 알리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통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지만 각종 SNS와 콘텐츠 플랫폼이 활발히 운영되는 요즘은 사정이 크게 달라졌죠. 이제는 어느 정도의 자본과 인력을 투입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만든 콘텐츠를 들고 수많은 소비자들과 곧바로 만날 수 있으니까요. 기업은 회사가 취급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영역에서는 미디어보다 더 높은 전문성과 풍부한 실전 업무 경험을 갖고 있는데요. 특정 분야에 대한 이 같은 높은 전문성과 콘텐츠 제작 역량이 결합되면서 기업들이 제작하는 콘텐츠의 수준도 과거보다 크게 높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신세계그룹, 현대카드, 쿠팡과 같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뉴스룸‧블로그‧뉴스레터는 해당 기업이 속해 있는 업계의 최신 트렌드와 산업 동향에 대한 흥미롭고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죠. 앞으로 자체 콘텐츠 제작에 뛰어드는 기업들은 더욱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이런 흐름이 거세질수록 기업 운영 채널의 미디어‧콘텐츠 플랫폼화 경향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에선 기업 내 콘텐츠 담당자분들을 위한 3가지 콘텐츠 제작‧글쓰기 노하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 콘텐츠를 제작하실 때 활용하시면 도움이 되는 노하우들입니다.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제가 실제로 제작했던 콘텐츠들의 사례를 하나하나씩 보여드리는 방식으로 말씀드릴 텐데요. 신문사에서 8년 반 동안 일하면서 그중 3년 반은 포털 내 콘텐츠 주제판을 운영하는 합작회사에서 콘텐츠를 제작‧편집했던 경험, 그리고 제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 실제로 기업들에 콘텐츠를 정기적으로 납품하고, 스타트업들의 콘텐츠 제작‧PR 업무를 도우면서 배울 수 있었던 점들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조 - 직장인으로 일주일에 하루만 활용해 6개 채널을 운영한 노하우) 1. 연재목록을 먼저 정하자
월가의 관행을 깨고 미국 최대 온라인 증권사가 된 '찰스슈왑'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은 미국 최대 온라인 증권사이자 인터넷전문 은행입니다. 증권‧은행 업무뿐 아니라 자산운용, 투자 자문 서비스도 제공하는 연 매출 14조원(121억달러‧2020년 기준) 규모의 글로벌 금융그룹이죠. 2021년 9월 말 기준 찰스슈왑이 보유하고 있는 고객 예탁 자산(고객들의 계좌에 담긴 자산)의 규모는 7조6100만달러, 한국 돈으로 9030조원에 달합니다. 전체 3270만 개의 증권계좌를 통해 일 평균 555만 건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죠. 은행 계좌 수도 160만 개에 달합니다. 찰스슈왑은 1974년 주식 중개 전문 증권사로 회사를 재정비한 이후 지난 50년 동안 경쟁업체들보다 저렴한 거래수수료와 최신 IT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온라인 거래 시스템을 앞세워 빠르게 성장해왔는데요. 2019년 10월에는 주식거래 수수료를 전면 폐지하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리테일 브로커리지 (Retail Brokerage‧개인 투자자 대상 주식 중개) 업계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은 대형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찰스슈왑이지만 이곳 역시 처음엔 아주 작은 회사에 불과했는데요. 1970년 초반 사업 초기에는 개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유료 투자 소식지 발간 사업, 뮤추얼‧헤지 펀드 운용, 벤처캐피털 투자 등 여러 영역에서 사업을 벌였지만 성과는 영 신통치 못했습니다. "나는 수십만 달러의 빚을 지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동업자 한 명이 내놓은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 은행에서 자금을 빌렸고, 이혼 후 상당한 신용대출도 떠안았다. 재혼을 했지만 이렇다 할 자산은 없었다" "나는 증권거래위원회가 수수료 관련 규제를 시범적으로 완화하면서 가능해진 주식 거래 수수료를 할인하는 실험을 1년째 하고 있었다. 나는 미지의 영역에 있던 셈이다" 회사의 창업자 찰스 슈왑이 서른여덟 살의 자신이 1975년에 처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한 말인데요. 찰스슈왑은 그가 창업한 세 번째 회사였습니다.
동네 철공소가 매출 1조 회사로 성장한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한국전쟁이 소강 국면을 맞으며 휴전의 기대감이 높아졌던 1953년 1월 30일 밤, 임시 수도였던 부산은 거대한 붉은 화염과 숨 막히는 매캐한 연기에 도시 전체가 휩싸였습니다. 신창동 일대에 자리 잡은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나면서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천 곳의 상가들과 그 안에 쌓여있던 제품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죠. 시장 안 음식점에서 시작된 불이 나무판자들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점포들에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모든 걸 집어삼켰던 건데요. 이 화재로 인해 4260곳의 가게가 불타 없어졌고, 시장 인근에서 생계를 꾸리던 6803가구, 3만여 명의 인원들이 한순간에 이재민이 돼 거리 위에 나앉게 됐습니다.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불길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는 상인들의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는데요. 신라상회란 이름의 자동차 부품상을 운영하던 서른 살의 강이준도 자리에 주저앉아 불타는 가게를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라상회는 몇 차례에 걸쳐 일본에 밀항해 생활했던 그가 일본에서 취득한 당시로서는 희소한 자격증인 운전면허증과 해방 이후 소방서에서 차량 정비 일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년 전에 창업한 회사였는데요. 따로 종업원도 두지 못하고 사장 혼자 일하는 자그마한 회사였지만 전국 곳곳을 누비며 부품들을 갖춰놓은 노력 덕분에 이제 막 거래처들을 늘려가며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집에 돌아온 강이준이 부인과 아들을 움켜 안고 "우린 이제 망했다. 쫄딱 망했다"라고 울부짖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그리고 이로부터 68년이 지난 2021년에도 강이준이 창업한 회사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데요. 단순히 국제시장 안의 오래된 점포로 명맥을 잇는 수준이 아니라 매년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로 성장했습니다.
'관리의 삼성'을 만든 이병철의 리스크 관리법 3가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54년 9월의 어느 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집무실로 미국의 모직기계 설비업체인 화이팅사의 영업 담당 임원이 찾아옵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국내 최초의 모직(양털로 만든 천) 생산 업체인 제일모직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생산설비 발주와 공장 설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요. 한국의 제일모직이란 회사가 대규모 생산설비를 구매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한 미국 대사관의 소개를 받아 이병철 회장을 찾아온 것이었죠. 이번이 벌써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요. 앞서 만남에서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화이팅사 설비 대신 유럽 업체들의 제품을 들여와 스스로 조립해 사용하려 한다'는 거절의 말을 들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아온 것이죠. 대화가 이어지던 중 갑자기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띤 화이팅사의 임원이 두 팔을 퍼덕거리며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흉내 냅니다. 다음처럼 말하면서요. "한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된다면 제가 하늘을 날아보겠습니다" 외국에서 기계를 들여오더라도 기계의 조립과 설치, 공장 건설, 생산 공정은 제일모직이 스스로 담당할 계획이라는 이병철 회장의 말에 대한 반응이었죠. 상대의 이 같은 무례한 행동에 이병철 회장은 조용히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제당공장을 지을 때에도 일본인들이 같은 말을 했지만 건설에 성공했습니다" "이번에도 제조기술만 도입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우리 손으로 건설해서 당신들을 놀라게 만들어드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화이팅사의 임원은 다시 한번 이병철 회장을 찾아옵니다. 모직 생산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공정임을 충분히 설명한 만큼 이 회장이 마음을 바꿨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자 이병철 회장이 책상 서랍에서 깨알 같은 메모가 빼곡한 서류 다발을 꺼내 들었는데요. 온도‧습도와 같은 기상조건과 전력‧노동력‧용수 등 자원의 조달 방안, 직원들에 대한 기술지도‧훈련 방안 등 공장 건설과 모직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치는 48개 항목마다 각각의 예상되는 문제점과 해결책을 정리한 자료였습니다. 이 자료를 본 화이팅사의 임원은 얼굴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건축만큼 개성 있는 안도 다다오의 4가지 비즈니스 원칙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독학으로 건축가가 되었다는 나의 이력을 듣고 화려한 성공 스토리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아무런 뒷배도 없고 혼자 건축가로 일했으니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살아왔을 리가 없다" "여하튼 매사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시작하면 대개는 실패로 끝났다" 안도 다다오, 건축에 큰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더라도 몇 번쯤은 들어보셨을 이름인데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프리츠커상 등 여러 유명 건축상을 수상한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한국인들에게도 그 이름이 익숙한 인물입니다. 회색빛 콘크리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간결한 선으로 이뤄진 건축물이야말로 그의 트레이드마크죠. 외국의 건축가가 그 이름을 다른 나라의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알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요. 그가 한국에서까지 그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걸어왔던 독특한 인생 경로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단 한 번도 정식으로 건축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트럭 운전사, 프로 복서 출신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세계 최고의 건축가가 됐다는 스토리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찾기 힘드니까요. 이번 글에서는 이처럼 오로지 독학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안도 다다오에게 배울 수 있는 4가지 비즈니스 비결에 대해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세계적인 거장인 만큼 그에 대해 다룬 글과 기사들은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철강왕' 박태준이 협상에서 활용한 2가지 병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73년 12월 23일, 당시 포항제철 사장이었던 박태준과 외국계약담당부장 노중열은 일본 도쿄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릅니다. 하루 전에 결정된 갑작스러운 출장이었는데요. 딱히 누구를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10시간을 날아 경유지인 독일 함부르크에 내린 박태준은 프랑크푸르트 대신 이곳에서 내리자고 말합니다. "호텔 예약도 안 돼 있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 부하 직원의 말에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면 돼 있소?" 라고 반문하면서 말하죠. 그만큼 아무런 준비 없이 급작스럽게 떠난 여정이었습니다. 함께한 부하 직원도 대체 이번 출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죠. 공항을 나와 호텔에 숙소를 잡은 박태준은 먼저 한숨 푹 잔 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대형 제철설비업체의 임원들에게 지금 당장 만나자는 전화를 겁니다. 당시 포항제철은 연간 철강 생산량 103만톤 규모의 1기 공장의 준공을 마친 뒤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동시에 더 큰 규모의 2기 공장 착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기 공사 이후엔 3, 4기 증설 공사도 계획돼 있었던 만큼 설비업체에 포항제철은 떠오르는 큰손이었죠.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었지만 전화를 받은 설비업체의 중역들은 자동차와 기차로 달려와 단 몇 시간 만에 호텔 객실로 모두 모여들었는데요. 그들의 손에 들린 가방에는 고로와 코크스, 소결 설비 등 회사가 판매하는 각종 제철설비를 소개하는 팸플릿들이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포철은 1기 설비의 대부분을 일본 업체에서 구매했지만, 2기부터는 유럽의 여러분에게도 문호를 활짝 열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2기 공사에 들어갈 설비 예정금액은 3억5000만달러입니다." "나는 원활한 입찰을 진행하기 위해서 새해 1월 5일까지 여러분이 직접 포철로 오시길 희망합니다. 우리 회사 2기 설비구매의 문호는 틀림없이 여러분에게도 활짝 열려있습니다." 모두가 모인 걸 확인한 박태준 회장은 설비업체 임원들에게 입찰에 참여하고 싶다면 약 2주 뒤까지 포항 영일만으로 와달라고 요구합니다. 설비업체 임원들 모두 연말, 연초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휴가 계획이 잡혀있었지만 포항제철 납품이라는 대어(大漁)를 낚을 기회 앞에서 휴가는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새해를 기념하는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극동의 바다가 궁금합니다"라는 미소 띤 대답과 함께 입찰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죠. 1970년 4월 경북 포항 영일만 허허벌판에서 첫 삽을 뜬 포항제철(포스코)은 1992년 9월 25일 전남 광양만에 광양제철소 4기를 준공하며 연간 2100만 톤의 철강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거듭나는데요.
'철강왕' 박태준이 준비된 창업자가 될 수 있었던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33년 9월의 어느 저녁,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여섯 살 소년이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부산항에 들어섭니다. 돈을 벌기 위해 몇 년 전에 일본으로 떠났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었는데요. 이 모자의 눈앞에 철로 건조된 4000톤급의 여객선 쇼케이마루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나타나자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가난한 어촌 마을에 나고 자란 소년에게 그동안 봐왔던 고기잡이배보다 몇천 배나 큰, 전기 조명에 밝게 빛나는 철선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괴수의 모습처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소년이 처음 근대의 웅장한 실체인 철(鐵)과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17년이 흐른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인근. 거세게 땅을 두드리는 굵은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국방색 전투복 차림의 스물세 살의 육군 대위 한 명이 소총 방아쇠에 검지 손가락을 건 채 전방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캐터필러의 육중한 소음이 북한군의 T34탱크들이 그의 부대를 박살내기 위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사흘이나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터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정신만은 또렷했습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가 제대로 뜻 한번 펴보지 못한 채 현대 기계공학의 산물인 강철 탱크에 짓눌려 목숨을 잃게 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얄궂기만 한 운명이었습니다. 다시 19년이 지난 1969년 12월, 경북 포항 영일만. 매서운 한겨울의 바닷바람이 황량한 모래벌판을 깊게 할퀴고 지나가는 그 자리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쇳물의 빛깔을 닮은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군인들처럼 열과 오를 맞춰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습니다. 잠시 뒤 한 40대 남성이 그들 앞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 외쳤습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우리 농민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의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일제의 35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받아낸 대일청구권자금을 토대로 시작된 제철소 건설 사업이었으니 조상의 혈세로 짓는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고졸 말단 영업사원 출신이 국내 맥주업계를 뒤집어놓은 3가지 영업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80년의 여름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주류 도매상 사무실로 양복을 갖춰 입은 25살 젊은 영업사원이 들어섭니다. 찌는듯한 날씨 탓에 영업사원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는데요. 몇 달 전 주류회사 진로에 입사한 신입 영업사원이 처음으로 자신이 담당하게 된 도매상의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는 자리였습니다. 명함을 주고받고 십여분쯤 대화가 오간 뒤 도매상 사장님은 영업사원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묻습니다. 이 신입사원과 같이 공채로 뽑힌 회사 동기는 모두 80명이었는데요. 그중에서 고졸 사원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68명은 모두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죠. 40년도 더 전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진로 같은 큰 회사에 사무‧영업직으로 입사한 젊은 직원들 중에는 이처럼 대졸자 비율이 훨씬 더 높았는데요. 도매사 사장님이 그 이전까지 만나왔던 진로의 젊은 영업사원들도 대부분 대학 졸업자들이었기에 사장님 입장에서는 부담 없이 편하게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신입 영업사원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상고(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고 대답합니다. 당황한 건 오히려 도매상 사장님이었습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 사장님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이번엔 어느 상고 출신이냐고 물었습니다. 덕수상고, 선린상고 같은 명문 상고들의 이름을 대면서 '뜻한 바 있어서 대학을 안 가는 대신 일찍 취업을 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답변을 유도했죠. 그러자 영업사원은 그런 명문 상고가 아니라 이름 없는 상고를 나왔고, 그저 공부를 못해서 상고를 가게 됐다고 답합니다. 중학교 때 태권도에 푹 빠져서 지내느라 공부를 좀 멀리했다는 말과 함께요. 실제로 이 신입사원은 태권도 6단으로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는 태권도 사범으로 일했을 정도의 고수였습니다. 영업사원의 대답에 도매상 사장님의 얼굴엔 너털웃음이 피어났는데요.
손정의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배운 '역전의 기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2008년 초 일본 도쿄 시오도메에 있는 소프트뱅크 본사 빌딩의 26층 회의실. 타원형 회의 테이블의 중앙에 앉아있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주변을 둘러싼 임원들에게 얼마 전 출시된 아이폰 3G 모델을 한 대씩 나눠주며 말합니다. "알고 있나? 노부나가가 철포(조총) 3단 공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 젊어서부터 철포를 가지고 다니며 사용법을 잘 익혀두었기 때문이야. 자네들 지금부터 아이폰을 가지고 원 없이 놀아봐" 이때로부터 433년 전, 일본 아이치현 신시로시 나가시노에선 수천 명의 기마무사들이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 같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적에게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일본 최강의 기마군단으로 꼽히는 다케다 가문의 무사들이었습니다. 상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질풍보다 더 빠르게 상대를 향해 꽂혀 들어가던 기마군단이 오다 군이 쳐놓은 나무 울타리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한 줄로 늘어서 있던 오다군의 1000자루 철포에서 동시에 총탄이 발사됩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총탄은 육중한 갑옷을 갖춰 입은 무사들과 말을 순식간에 꿰뚫어버립니다.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1000자루의 총들에서도 곧바로 총탄이 쏟아져 나왔고, 이어 세 번째 줄에 자리 잡았던 철포들에서도 1000개의 총탄이 튀어나갑니다. 3000발의 총성이 그치고 뿌연 화약 연기가 조금씩 사라지자 보이는 건 사람과 말의 시체가 가득 쌓인 피에 젖은 들판뿐이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손에 일본 전역의 패권이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손정의와 오다 노무나가
김앤장의 급성장을 만들어낸 4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김앤장, 평소 시사 뉴스를 거의 읽지 않으시는 분들이더라도 몇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이름인데요. 사회‧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굵직굵직한 소송 이슈들이 다뤄질 때면 항상 함께 나오는 이름이죠. 1973년 설립된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어느 면에서나 압도적인 국내 1위 로펌입니다. 법률신문 보도에 따르면 2020년 김앤장의 매출은 1조1000억원대로 3년 연속 1조 원대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2위인 태평양(3505억원)보다 3배나 더 큰 액수입니다. (참조 - 6대 대형로펌, 작년 매출 2조5000억 기록) 김앤장에 소속된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변리사, 관세사 등 전문직들의 수는 1700여명에 달합니다. 국내 로펌들 중에서 유일하게 글로벌 100위 안에 드는 로펌이죠. (The American Lawyer's The Global 200 기준 세계 60위) (참조 - 김앤장, 2019년 매출기준 세계 60위) 이처럼 법조계는 물론 우리 사회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로펌인 만큼 김앤장에는 비판의 눈초리와 긍정의 시선이 동시에 따라붙는데요. 김앤장을 향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은 '전관 영입'과 '회전문 인사'에 대한 것입니다. 법원, 검찰 같은 법조계는 물론 국세청, 관세청, 경찰, 감사원, 공정거래위원회, 노동부 같은 권력기관과 각 행정부처 출신 고위급 인사들을 영입한 뒤 이들을 통해 해당 기관들에 보이지 않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비판이죠. 김앤장을 거쳤던 인사들이 다시 고위 공직자나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과정을 통해 김앤장의 입김이 더욱더 세진다는 비판도 있고요. 대기업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는 경우가 많아 대기업들과 민감한 노동 분야 이슈를 놓고 첨예한 소송을 벌이는 시민단체, 노동계로부터는 '친재벌 로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공부 너무 많이 해서 문제" 카이스트 총장이 된 '큰 괴짜'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와 공학기술 개발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데 이견이 있으신 분들은 거의 없으실 텐데요. 조직의 설립 목적 자체가 그렇습니다. 카이스트는 1971년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목표에 따라 국내 최초의 이공계 특수대학원으로 설립됐습니다. 미국 국제개발처가 제공한 차관, 즉 외국에서 빌려온 돈을 투자해 설립한 학교였는데요. 당시 미국 국제개발처의 타당성 조사단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프레드릭 터만 박사는 카이스트의 30년 뒤의 모습에 대해서 ‘국제적인 명망을 가진 이공계 교육 기관으로 성장해 학계의 본보기가 되는 학교’, ‘한국인의 생활 수준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학교’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터만 박사의 예견은 이미 현실이 됐죠. 총장이 된 괴짜 교수 그리고 2021년 3월, 앞으로 4년간 카이스트를 이끌 새로운 선장으로 이광형 총장이 취임했는데요. 이광형 총장은 취임식 자리에서부터 파격적인 발언으로 과학기술계와 교육계를 놀라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카이스트의 문제점은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전공 공부 시간을 10% 줄이고 그 시간에 인성과 리더십을 교육하겠습니다” “성적 우수상 외에 질문왕, 도전왕, 독서왕, 봉사왕을 총장상으로 제정하겠습니다” “연구실 하나가 벤처 하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부작용이 생길 정도로 창업을 지원하겠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80%가 넘는 연구 과제에는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취임식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했던 말인데요.
박현주가 국내 1위 증권사를 키워낸 4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한국 금융산업 역사상 가장 큰 성취를 이뤄낸 개인이라고 부르는 건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1997년,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직원 9명과 함께 창업한 회사를 24년 만에 1만 명의 임직원이 일하는 국내 19위의 대기업 그룹 (2020년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기준)으로 키워낸 인물이니까요. 주력 계열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굴리는 운용자산은 2020년 기준 132조원으로 10년 넘게 국내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미래에셋증권의 2020년 매출은 16조8905억원, 영업이익은 1조1047억원에 달합니다. 국내 증권사 중에서 1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거둔 곳이 나온 건 미래에셋이 처음입니다. 국내 주요 금융그룹 대부분이 애초부터 대규모 자본의 주도로 설립된 것과 달리 미래에셋은 박현주 개인의 역량과 브랜드를 중심으로 성장해왔는데요. 그를 뛰어난 투자자이면서 동시에 특출난 창업자‧사업가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증권업계 1등 영업맨이던 서른아홉 살 박현주가 국내 최대 금융그룹의 창업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4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박현주 회장이라고 해서 항상 시장을 이기면서 미래에셋에 돈을 맡긴 고객들의 돈을 불려줬던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1999년에 설정된 ‘박현주 2호 펀드’는 닷컴버블 붕괴로 인한 증시 폭락으로 투자자들에 투자원금에 손실을 입혔고요. 2007년에 설립된 ‘인사이트 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1년 만에 마이너스 53.3%라는 참담한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주식시장이 회복되며 인사이트 펀드의 수익률도 설정 이후 기준 127%(2021년 3월)를 기록하고 있지만 2008년 당시에는 무려 400만명이 넘는 투자자들이 손해를 본 채 펀드를 깨야만 했습니다. 인사이트 펀드는 2011년에도 한 해 동안 마이너스 17%라는 저조한 수익률을 기록했고 결국 박현주 회장은 일간지 광고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사과를 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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