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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표 기자
경제신문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뒤 9년간 일하다, 경제/금융 콘텐츠 제작기업 '레드브릭 콘텐츠'를 창업해 3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등 몇 권의 책을 썼습니다. 메일 주소는 sean@outstanding.kr 입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를 만든 7가지 지적 경험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27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17세 청년이 고향을 떠나 독일 함부르크에 자리를 잡는데요. 이곳에 있는 면제품 수출 회사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집안 형편만 놓고 보면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일자리를 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의사, 변호사, 교수, 공무원 등을 배출해온 중상층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회사에 들어가 일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도 이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는 ‘진짜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그다지 쓸모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학교 생활이 지겨웠고, 또 일을 해보고 싶었다”는 게 훗날 이 청년이 남긴 말이죠. 그래서 청년은 일단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함부르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한 뒤 학업에는 신경을 끄고 회사 일과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공부하는 데만 집중합니다. “당시는 조교들이 교수를 대신해서 출석 확인을 했는데, 그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쥐여주는 것으로 출석 문제는 충분히 해결됐다” 매일 오후 4시에 회사 일을 마친 청년이 곧장 달려간 곳은 회사 근처 도서관이었습니다. 평일에는 이곳에서 매일 저녁 늦게까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죠. “나는 주중의 5일 동안은 함부르크의 유명한 시립 도서관에서 저녁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15개월 동안 나는 독일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2005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청년의 이름 앞에는 항상 따라붙는 호칭이 있습니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에디슨'을 롤모델로 삼은 3가지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같은 실리콘밸리의 거물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울러 세상을 떠난 지 100년 가까이 된 오늘날까지도 그가 수많은 창업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인물이죠. 어린 시절 다들 한 번쯤은 그를 다룬 위인전을 읽어보셨을 텐데요. 그렇기에 오늘날 테크산업의 거물들이 그를 롤모델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걸 꿈꾸는 창업자가 백열전구, 축음기, 영사기처럼 세상에 없던 최첨단 제품을 잇달아 발명한 당대 최고의 발명가를 존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나의 역할 모델은 에디슨이다. 테슬라 모터스와 스페이스X 뒤에 있는 정신은 에디슨의 백열전구와 영사기이다” 일론 머스크가 2008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남긴 말인데요. 이 인터뷰에서 머스크는 자신이 회사 이름을 에디슨의 경쟁자였던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건 “전기 자동차의 전원이 테슬라가 개발한 교류 전력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롤모델은 에디슨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참조 - Elon Musk interview reveals whether he prefers Nikola Tesla to Thomas Edison) 일론 머스크가 에디슨을 롤모델로 삼은 건 단순히 그가 뛰어난 발명가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에디슨을 ‘그저’ 위대한 발명가로만 여기는 건 그가 이뤄냈던 성과의 극히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이죠. 에디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아이디어와 기술력만을 바탕으로 거대 기업을 일궈낸 창업자였습니다.
"학식이 없다고 지혜도 없는 건 아니다".. 정주영의 3가지 사고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한국 경영자에 대해 다룬 책을 읽을 때 좋은 점은 익숙한 지명과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건데요. 직접 가봤던 장소들도 이따금씩 등장하기에 책 속의 풍경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게 되죠. 정주영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도 그랬는데요. 특히 제가 한때 매일 걸어다녔던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있었던 일화는 더욱더 생생하게 그려지더군요. “네가 크게 되어서 부모 형제 다 서울로 불러올려 끌끌이 거느려 나갈 수만 있다면, 애비가 그걸 뭣 땜에 말려” “그러나 너는 보통학교밖에 못 나온 촌놈이라는 걸 알아야지” “무식한 네가 잘되면 얼마나 잘되겠냐. 부기 학원 나와봤자 일본놈들 고쓰가이(사환)밖에 더 하냐” 이 말은 열여덟 살 정주영이 아버지가 소를 팔아 마련한 70원을 훔쳐 들고 세 번째로 집을 뛰쳐나와 부기 학원(회계 장부 작성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다니다 아버지에게 붙잡힌 뒤 들어야만 했던 말인데요. 이 말처럼 그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가난한 촌놈에 불과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오늘날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창업자로 불릴 수 있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불도저' 정주영? 정주영만큼 불굴의 도전정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도 없을 겁니다. 그가 남겼던 수많은 말들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이봐, 해봤어’인 것도 그가 끝 모를 도전정신으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죠.
'머니볼'에서 배우는 최소 자원으로 최대 성과를 내는 4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2001년 6월의 어느 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자리 잡은 콜리세움 구장. 이곳은 메이저리그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홈구장인데요. 아침 일찍부터 경기장 내 회의실로 야구단 직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날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모두에 매우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새롭게 영입할 선수들을 뽑는 신인 드래프트가 열리는 날이었으니까요. 드래프트 결과에 따라 앞으로 몇 년 뒤 팀을 이끌어나갈 선수진이 결정되게 되죠. 구단주는 물론이고 그의 아내와 친구들까지 찾아와 애슬래틱스의 미래가 결정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요. 점잖은 분위기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자리였습니다. 드래프트가 시작되고 애슬레틱스의 차례가 찾아오자 스카우트 부서의 책임자가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고 시속 151㎞의 불같은 직구를 던지는 당당한 체격의 고등학교 졸업 투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부분의 구단이 탐낼 만한 유망주였죠. 그리고 스카우터 책임자의 입에서 선수의 이름이 나옴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 하나가 회의실 벽에 날아가 부딪혔습니다. 얼마나 세게 던졌던지 의자는 산산조각이 났고, 벽에는 커다란 구멍까지 뚫렸습니다. 의자를 집어던진 남자는 키가 193㎝나 되는 덥수룩한 갈색머리를 한 40세 남자였습니다. 벽과 의자를 박살내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남자는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기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월가의 영웅' 피터 린치가 개인 투자자에게 전하는 4가지 조언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개인 투자자들에게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투자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오랫동안 살아남아 계속해서 읽히는 책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요. 바로 뚜렷한 메시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는 겁니다. 오늘 다룰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개인 투자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투자 기법, 원칙, 태도를 전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쓰인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뛰어난 펀드 매니저로 불리는 피터 린치입니다. 그가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건 압도적인 성과 덕분인데요. 1977년 33살의 나이로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의 주식형 펀드인 마젤란펀드를 책임지게 된 그는 1990년까지 13년간 펀드를 운용하면서 2700%, 연평균 29%라는 수익률을 올립니다. 같은 기간 미국 대표 주가지수인 S&P 500이 보여줬던 성장률의 두 배가 되는 수익률이었습니다. 마젤란펀드가 뛰어난 성과를 보이면서 펀드가 운용하는 자산도 급격하게 불어났는데요. 1977년 2000여만 달러에 불과했던 운용자산은 1990년에는 140여억달러로, 660배가량 늘어났습니다. 자산 규모가 600배 넘게 불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평균을 뛰어넘는 우수한 성과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앞에서 인용했던 문장은 그가 2000년 이 책의 밀레니엄 개정판 서문에 썼던 첫 문장인데요.
'최고의 리더'들이 이 스포츠를 최고라고 하는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저는 평소 탁월한 인물들에 대해 다룬 평전이나 그들이 직접 쓴 자서전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요. 우선 그처럼 뛰어난 성과를 이뤘던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가는 게 재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전략을 바탕으로 어떻게 노력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는지 배울 수 있는 것도 좋고요. 이런 책들을 읽은 뒤 그들에게서 배운 전략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서 쉽게 풀어쓴 덕분에 '아웃스탠딩'에도 약 2년간 꾸준히 글을 연재할 수 있었죠. 최고의 리더들에 대해 다룬 책에는 그들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내용도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이 시절의 경험이야말로 한 사람의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이렇게 그들의 성장기를 읽으면서 그들이 즐겼던 스포츠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는데요. 상당히 많은 수의 리더들이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를 즐겼죠. 운동을 통해서 다져진 체력과 정신력은 그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니까요. 특히나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 스포츠는 꺾이지 않는 도전 정신,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 수립 능력, 팀워크를 익히는 데는 최고로 꼽히는 스포츠죠.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명예회장,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벤 호로위츠 안드레센 호로위츠 창업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그리고 ‘1조달러 코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실리콘밸리 거물급 기업인들의 멘토 역할을 했던 빌 캠벨이 젊은 시절을 바쳤던 스포츠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최고라 불리는 창업자, 경영인들이 젊은 시절 열중했던 한 가지 스포츠와 그들이 이 스포츠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을 읽어보시면 꼭 이 종목이 아니더라도 어렸을 때 팀 스포츠를 해보는 게 성인이 돼서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어린 자녀가 있으신 분들에게 오늘 글이 더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국인이 사랑한 스포츠
29세 바이든이 첫 상원의원 선거에서 역전승을 거둔 5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변호사로 일하다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 36년(6선) 동안 연속해서 상원의원으로 근무, 부통령으로 8년간 재직, 대통령에 도전해 당선. 이 같은 이력만 보면 조 바이든을 전형적인 워싱턴 주류 정치인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타고난 배경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정치에 입문한 뒤 줄곧 탄탄대로만 걸어온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데요. 어린 시절부터 정치와 공직에 대한 강렬한 야망을 품어왔던 것은 분명 맞지만 그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인물입니다. 그의 집은 가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네 아이를 키우느라 항상 형편이 빠듯했던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요. 대학교와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변호사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미국 의회 인명록을 훑어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의회에 입성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변호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상‧하원 의원) 중 많은 사람이 부유하고 안정된 가정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충격받았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에 진출한 사람들은 거의 변호사였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로 진로를 정했다” 이미 십대 시절부터 미래의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분석한 뒤, 이를 행동으로 실천했던 모습을 보면 바이든이 탁월한 전략가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텐데요. 특히 전략가로서의 바이든의 모습은 첫 번째 상원의원 선거 당시 그가 취했던 행동들을 분석하면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판단력과 흔들림 없는 실행력이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가 결국 미국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던 든든한 밑바탕이었습니다. 0. 거물에 도전한 애송이 1972년 선거 당시 바이든은 조그만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카운티 의회 의원으로 첫 번째 임기를 보내던 이름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는데요.
삼성 임원에게 전해지는 '지행33훈' 속 이건희의 인재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2020년 10월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삼성그룹에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든,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든 간에 그가 한 시대를 이끌었던 거물이란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하실 텐데요. 한 시대를 상징했던 거물의 죽음만큼 시대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사건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철학인 ‘지행33훈’을 바탕으로 1987년, 마흔다섯의 나이에 삼성그룹 회장이 됐던 그가 오늘날의 삼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지행33훈’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도 그의 인재경영 전략을 초점을 맞춰, 그가 어떤 식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활용하고, 키우고, 평가해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행33훈' 먼저 ‘지행33훈’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지행33훈’은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을 담은 책자인데요. 삼성그룹에서 이건희 회장이 평소에 이야기했던 발언들을 모아 주제에 따라 분류한 뒤 그 핵심 내용을 정리해 한 권의 책자로 만들었죠. ‘지행33훈’은 각 주제마다 4가지 구성요소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선 각 주제를 상징하는 상징적 문장이 먼저 나옵니다. 예를 들어 1훈 위기의식의 경우에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라’라는 문장이 나오죠.
스타벅스의 미래를 결정한 '프라푸치노 논쟁'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스타벅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브랜드인데요. 전 세계 80여개국에서 3만곳이 넘는 매장을 운영하는 연매출 30조원 규모의 세계 최대 커피 프랜차이즈죠. 전 세계 커피 업계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입지를 구축한 회사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스타벅스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내부 논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만약 이 논쟁의 결과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더라면 그리고 스타벅스가 고객의 요구에 무관심했다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스타벅스는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오늘의 작은 결정이 기업의 내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스타벅스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업의 원칙은 과연 누구를 위한 원칙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건 팔아선 안 돼" 프라푸치노(Frappuccino)는 스타벅스의 대표 메뉴입니다. 갈아 만든 얼음에 커피를 섞어 낸 음료죠. 추가로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자바칩 프라푸치노’, ‘유기농 말차 프라푸치노’, ‘딸기 레이어 슈크림 프라푸치노’ 등 다양한 메뉴가 있죠. 차갑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프라페’(frappe)와 ‘카푸치노’(Cappuccino)를 합성해서 이름입니다.
워런 버핏이 싫어한 6가지 유형의 '중개인'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시장경제의 영웅’입니다. 그만큼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죠. 투자와 사업을 통해 735억 달러 (약 87조 원・2020년 7월 기준)라는 막대한 부를 일궜을 뿐 아니라 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계 최고의 부호이지만 그의 평소 생활은 소박하기만 합니다. 스물여덟 살이던 1958년에 3만1500달러(약 3700만원)를 주고 산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고, 수십 년째 다니고 있는 단골 이발소에서 12달러를 내고 이발을 하죠. 좋아하는 음식은 20달러짜리 스테이크고 아침은 출근길에 직접 차를 몰고 들르는 맥도널드 드라이브 스루에서 산 맥머핀으로 해결합니다. “주식 시장이 좋을 땐 베이컨과 달걀, 그리고 치즈 비스킷이 들어간 3.17달러짜리 세트를 먹고 보통이면 2.95달러짜리를 그리고 일이 그다지 잘 돼가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땐 소시지 패티 두 장이 들어간 2.61달러짜리 메뉴를 먹죠” 스스로의 힘으로 막대한 부를 일궜지만 언제나 검소하게 생활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기부하는 데 쓰고 있는 이 유쾌한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데요. 그런데 이렇게 다정하게만 보이는 버핏이지만 때로는 누구보다 매섭고 날카롭게 비판의 칼날을 휘두를 때가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 버크셔가 이런 사람들과 계약을 맺는다면 화가 치솟아서 다시 살아 돌아올 거라고 말했을 정도죠.
80개 계열사를 거느린 CEO 워런 버핏의 4가지 경영 원칙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워런 버핏,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그는 오늘날 투자자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 많은 돈을 투자로 벌어들였기 때문이죠. 그의 공식 직함은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CEO)인데요. 버크셔 해서웨이가 어떤 회사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워런 버핏이 만든 회사니까 투자하는 회사 아니겠어?’라고만 생각하실 분들이 많으실 거 같습니다. 1965년, 그가 35살의 나이에 인수했을 때만 해도 버크셔 해서웨이는 다 망해가던 작은 섬유회사였습니다. 그리고 55년이 지난 오늘날 버크셔 해서웨이는 계열사는 80여곳, 임직원 40만명의 거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국내 임직원 수가 10만여 명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규모의 회사라는 걸 아실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워런 버핏을 투자 천재로 알고 계시지만 이처럼 그는 초대형 기업의 현직 CEO이기도 합니다. 90세가 된 지금도 직접 회사를 이끌고 있죠. 이번 글에서는 투자의 전설 워런 버핏이 아닌 탁월한 경영자로서의 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무협소설 거장 김용'에 가려진 'IPO에 성공한 창업자 김용'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신필(神筆), 신과 맞먹는 필력을 갖춘 작가,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면 ‘하늘이 내린 작가’라는 뜻인데요. 신필이라는 표현 뒤에 꼭 따라붙는 두 글자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김용(金庸·중국어 발음 진융)이죠. 신필 김용이라는 말이 익숙하시다면 분명 다음 제목들도 낯설지 않으실 텐데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 같은 제목들입니다. 특히 앞에 세 작품은 국내에선 ‘영웅문’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죠. 이 책들이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이름을 들으시면 손에 땀을 쥐면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던 추억이 저절로 떠오르실 텐데요. 곽정, 황용, 양과, 소용녀, 장무기, 영호충, 동방불패, 소봉 같은 이름들이죠. 이번 글의 주인공은 방금 말한 작품들과 수많은 등장 인물들을 탄생시킨 무협소설의 거장 김용입니다. 김용은 ‘중국의 셰익스피어’ 혹은 ‘동양의 톨킨’(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 으로 불리는 작가입니다.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죠. 2018년 10월 30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중국, 대만, 홍콩 등 중화권 매체들은 물론 국내 언론들도 그의 부고 기사를 크게 다뤘는데요.
그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는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04년의 어느 날, 인천 제물포항. 아홉 살짜리 한 꼬마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큰 배에 홀로 올라탑니다. 다른 가족들과는 이미 며칠 전 평양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인천까지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도 여기서 헤어져야 했죠. 멀고 먼 뱃길 끝에 한 달이 지나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요.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지나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의 작은 마을 카니에 도착해서야 아이의 여정은 끝이 납니다. 이 아이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는 2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얼마 전 막 결혼한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였습니다. 1926년 인천항에 내려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이들 부부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있었는데요. 신문사 기자들이었습니다. 그다음 날 ‘동아일보’에는 ‘적은 자본으로 식료품 장사를 시작해 수백만 원의 큰 회사를 이룬 유일한 씨, 중국인 부인과 귀국’이라는 기사가 부부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렸죠. 이 남자는 바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였습니다. 기사 제목대로 그는 이미 그때 미국에서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죠. 그의 아내 호미리 여사는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받은 인물로 중국에서도 큰 부호로 꼽히는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중국 남경(난징)에서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의 가문이었으니까요.
오늘날 디즈니를 만든 밥 아이거, 그가 직장상사에게 배운 4가지 교훈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은 오늘날 미국 재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로 꼽힙니다. 2005년부터 2020년 2월까지 15년 동안 디즈니의 CEO로 일하면서 과감한 인수합병과 공격적인 투자로 디즈니를 몰라보게 달라지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취임 이듬해인 2006년 애니메이션 전문 회사 픽사를 74억달러에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2009년엔 마블(40억달러)을, 2012년엔 루카스 필름 (스타워즈 제작사·40억달러)을, 그리고 2019년엔 영화사 21세기 폭스(713억달러)를 인수했죠. 이 같은 인수를 통해 디즈니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부터 시작해 ‘어벤저스’, ‘심슨네 가족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든 수많은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고 매력적인 콘텐츠들로 가득 찬 콘텐츠 제국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참조- ‘디즈니+’의 막강한 라인업을 M&A를 통해 만든 ‘좋은 사람’ 밥 아이거) 그저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히어로들의 숫자만 늘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콘텐츠 소비의 중심이 기존의 영화관 상영, TV 방송에서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온라인 스트리밍 방식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는 걸 직감한 그는 2017년 8월 디즈니만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내놓겠다는 전략을 내놨습니다. 2019년 11월 출시된 디즈니 플러스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죠. 이 서비스는 출시 반년 만에 유료 가입자 5450만명을 기록하며 넷플릭스를 맹추격하고 있습니다. 밥 아이거는 뛰어난 경영능력만큼이나 겸손하고 따뜻한 인품으로도 유명한데요.
자선단체를 스타트업처럼 경영하는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미국 뉴욕에 자리 잡은 ‘채리티:워터’(charity: water)는 2006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국제 자선단체입니다. 이름을 보고 짐작하실 수 있듯이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해 고통받는 저개발국가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걸 목표로 만들어진 단체죠. 지금껏 15년 동안 전 세계 28개국에서 5만1438건의 프로젝트 (우물·정수시설 설치)를 마무리해 1125만 2945명의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쉽고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수많은 기부자들이 낸 기부금 덕분에 이 같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는데요. 2018년 한 해 동안 채리티워터가 모은 기부금은 6930만달러에 달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829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1년 안에 모았으니 그 규모가 작지 않은 단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채리티워터는 처음 설립됐을 때부터 기존의 자선단체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부금 모금, 운영 방식, 홍보·마케팅 전략을 앞세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요. 이런 차별화된 모습은 대부분 채리티워터의 설립자인 스캇 해리슨의 독특한 인생 이력에서 비롯됐습니다. 스캇 해리슨은 우리가 떠올리는 국제 구호·자선단체의 창립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서른한 살의 나이로 채리티워터를 설립하기 전까지 그는 10년간 나이트클럽 프로모터로 일했는데요. 미국 뉴욕에서도 가장 ‘핫’한 고급 클럽으로 돈 많고, 유명한 VIP(중요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게 그의 일이었죠. 유흥계의 밑바닥부터 한 계단씩 올라오면서 쌓아온 네트워크를 활용해 돈을 물 쓰듯 쓰는 거물들을 클럽에 불러 모은 뒤 그날 나온 매출을 클럽 사장과 나눠 갖는 일이었죠. “밤이면 밤마다 시내에서 가장 핫한 파티장을 찾아 그곳 사장들과 함께 예쁜 여자들을 대동하고 값비싼 샴페인을 마시며, 가끔은 뿌리기도 하며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놀았다”
'대기만성'이 뭔지를 보여준 아이젠하워의 인생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대통령으로서 8년간 미국을 이끌었던 인물이죠. 군인으로서 그가 거둔 최고의 전공은 1943년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아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 대륙을 탈환하고 결국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무너뜨린 일이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는 이후 미 육군 참모총장, 컬럼비아대학교 총장, 북대서양조약기구 총사령관(NATO)을 거친 뒤 1952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군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두루 거친 뒤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건데요.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부드럽고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미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겸손하고 살가운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에 취임한 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총장 전용 VIP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갈 수 있었던 대학 본관 높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던 총장실을 누구나 오며 가며 볼 수 있고 들릴 수 있는 1층으로 옮긴 일이었습니다. ‘리더라면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하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가 40년 가까이 군인으로 살면서 배운 교훈이었죠.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일할 때도 시간이 될 때마다 일선 부대에 들러 일일이 병사들의 이름과 고향을 물으며 이야기를 나눴을 만큼 부하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952년 대선 당시 그와 공화당이 내세웠던 선거 슬로건은 'I like Ike'(나는 아이젠하워가 좋아· 아이크(Ike)는 그의 별명)이었는데요.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아이젠하워의 인기를 전면에 내세운 짧지만 강렬한 문구였습니다.
돈, 지위, 명예를 포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땅콩박사'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896년 4월 5일,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농업대학의 석사 연구원이던 조지 워싱턴 카버는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아이오와대학교를 떠나 자신의 학교로 와달라는 스카우트 제안이 담긴 편지였죠. 먼저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돈이나 지위나 명예는 줄 수 없습니다. 아마 돈과 지위는 이미 가지고 있을 줄 믿으며 명예도 현재 당신의 위치로 보아서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감히 당신께 권하는 것은 위에 말한 세 가지를 단념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이라고 해도 스카우트를 제안하면서 돈과 지위, 명예 모두를 포기해달라고 말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더 높은 직급과 더 많은 연봉을 제안해도 원래 다니던 직장을 옮길까 말까 고민할 텐데 돈, 지위, 명예 모두를 포기해달라고 하다니요. 눈에 띄는 점은 하나 더 있었는데요. 바로 편지를 읽고 있는 주인공의 외모였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아이오와대학교의 최초의 흑인 입학생이자 당시 유일한 흑인 석사 연구원이었습니다. 편지의 뒷부분을 좀 더 살펴볼까요? “제가 이것들 대신에 당신에게 드리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 곧 우리 흑인 동족을 타락하고 가난하고 버림받는 지경에서 끌어올려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1864년 미국 미주리주의 다이아몬드 그로브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해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철폐되기 1년 전이었죠.
위대한 기업도 처음엔 '장사치'로 시작합니다. 나이키도 그렇습니다.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야, 유튜브 할 때 책 좀 적당히 깔아놔. 책 팔러 온 장사치 같아” 두 달 전쯤에 왕십리역 근처에 있는 한 고깃집에서 친구와 소주 한 잔 하다가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저의 두 번째 책의 출간을 기념해서 네 명이서 만난 자리였습니다. 저를 ‘장사치’라고 부른 친구는 나름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한 회사의 창업자였는데요.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한 건 제가 유튜브 방송을 할 때마다 항상 뒷배경에 첫 책과 두 번째 책을 몇 권씩이나 깔아놨기 때문이죠. 시청자들에겐 그런 모습이 ‘책을 팔아먹으려고 방송을 만드는 것’처럼 비출 수 있으니까 그러지 말라는 말이었죠. 사실 장사치라는 말은 그다지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닌데요. 어떻게든 물건을 파는 데만 정신 팔린 얄팍한 인간이라는 깔보는 어감이 담겨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친구에게 ‘장사치’라는 말을 들은 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는데요. 우선은 저와 제 방송을 걱정해서 해주는 조언이기도 했고요. 또 ‘장사치’라고 불릴 정도로 내가 내 책들, 내가 만든 상품을 파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여러 기업인들을 다룬 평전과 자서전, 뛰어난 기업들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여러 비즈니스 서적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기 때문인데요.
멜린다 게이츠의 두 가지 무기 '전략적 지렛대와 입소문'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빌 게이츠, 굳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죠. 하지만 이번 글에서 빌 게이츠는 주연이 아닌 그저 조연일 뿐인데요. 이번 글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아내 멜린다 게이츠입니다. 멜린다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질 텐데요. 평소 국제 뉴스를 관심 있게 보시는 분이라면 게이츠 부부가 둘의 이름을 딴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만들었고 이곳을 통해 전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질병, 굶주림, 각종 차별 등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뉴스를 통해서 멜린다 게이츠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 분들이더라도 대부분은 그를 빌 게이츠의 아내 정도로만 알고 계실 텐데요. 멜린다 게이츠라는 사람이 누군지, 그가 빌 게이츠와 결혼하기 전까진 어떤 경력을 쌓아왔는지, 재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까지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재단의 이름이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이긴 하지만 실제로 재단을 이끌어나가고 어디에, 얼마를 기부(투자)할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업무는 빌 게이츠가 맡아서 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멜린다에게 공동의장이란 직함이 붙은 건 빌의 아내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멜린다 게이츠는 누구인가 하지만 멜린다 게이츠의 책 ‘누구도 멈출 수 없다’를 읽고 나서 이런 저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창업자는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는데요.
스탠 리를 ‘마블의 아버지’로 만든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스탠 리(Stan Lee). 초능력을 갖춘 주인공들이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슈퍼 히어로물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 그중에서도 마블 스튜디오에서 나온 영화의 팬이시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이름인데요. 스탠 리라는 이름은 낯설더라도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판타스틱4, 엑스맨 같은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이 캐릭터들은 모두 ‘마블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 리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인데요. 그는 2차 세계대전 전인 1940년 만화 출판사에 취직한 걸 시작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2018년까지 약 80년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수많은 캐릭터들과 스토리를 만들어낸 작가입니다. 처음엔 만화로 시작했지만 세상의 흐름에 따라 그의 활동무대도 점차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게임 등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업계 전체로 넓어졌죠. 수많은 슈퍼히어로들을 창조한 그에겐 ‘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호메로스’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타고난 이야기꾼 스탠 리가 이처럼 창작자로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3가지 비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 같은 그의 분신들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하지만 마블 영화와 만화를 몇 번씩 챙겨보는 마니아분들이라고 해도 제가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를 모두 알고 계신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스탠리 마틴 리버가 본명인 그가 스탠 리라는 필명을 쓴 건 그가 만화 작가‧편집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창피하게 여겨서 자기가 만화업계에서 일한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우선 그렇고요. 그가 만화 출판사에서 일한 지 20여년이 지났을 무렵 매일 같이 다른 회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베껴야 하는 자신의 일에 신물이 나 회사를 때려치우려고 했었다는 사실도 잘 모르셨을 겁니다. 판타스틱4가 그가 회사에 사표를 내기 전에 ‘내가 쓰고 싶은 대로 한 번만 써보고 그만두자’라는 생각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라는 사실도요.
가진 게 적을 때 성과를 내는 마윈의 3가지 전략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몇 년 지나면 베이징이 나한테 이러지 못할 거야. 몇 년 후에는 모두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1995년 겨울, 중국 베이징에서 남부 항저우로 떠나는 고속버스 창문에 얼굴을 기댄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가 내뱉은 말입니다. 그 몇 개월 전 마윈은 중국 최초의 상업 인터넷 사이트인 '차이나페이지'를 개설하고 자신의 고향인 항저우에서 막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호텔, 수출 업체, 지방정부 기관 등 해외 고객에게 자신들을 알릴 필요가 있는 곳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해주는 회사였죠. 처음엔 회사에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개발 인력도 없어서 마윈과 회사 동료들이 일감을 따오면 그 내용을 미국 시애틀에 있는 협력사에 보내 홈페이지를 제작한 뒤 돈을 나눠 가졌습니다. 영어 강사 출신으로 영어를 원어민만큼 잘하는 마윈이 홈페이지에 들어갈 내용을 영어로 작성한 뒤 사진과 함께 미국 시애틀에 국제 우편으로 보내면 미국인 개발자들이 이에 따라 홈페이지를 만드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원시적’인 방식이었죠. 오늘날에는 한 해에 63조원가량의 매출(2018년 기준‧3768억 위안)을 올리고, 매년 11월 11일 열리는 온라인 세일 이벤트인 광군제(光棍節‧독신자의 날)엔 자사 쇼핑몰에서 하루에 약 44조원(2019년 기준‧2684억위안) 어치의 상품을 판매하는 글로벌 IT기업이지만 그 시작과 전신은 이처럼 보잘것없었던 건데요. 1995년의 '차이나페이지'를 보고 지금의 알리바바를 그릴 수 있었던 사람은 마윈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1995년 가을 그는 베이징에 있는 중앙정부 부처와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서 홈페이지 주문을 수주하고, 자기 회사를 알리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베이징으로 올라옵니다. 항저우에서 지방정부 홈페이지를 성공적으로 만든 덕에 지역 신문에도 연달아 소개되는 등 나름대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이런 명성을 바탕으로 수도 베이징에 진출해 사업을 키우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는 “중국의 야후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의 중앙 부처 공무원들과 공산당 간부들에게 마윈은 인터넷이라는 수상쩍은 물건을 들고 찾아온 사기꾼 혹은 잘 봐줘봤자 잡상인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이야 ‘중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당시만 해도 베이징에서 마윈은 작고 볼품없는 ‘촌놈’으로 보였습니다. 중국 최초의 상업용 웹사이트인 '차이나페이지'가 만들어진 게 불과 몇 달 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죠. 결국 486 노트북 한 대와 홍보자료 한 다발을 들고 큰 꿈에 부풀어 올라왔던 마윈은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요. 마윈은 훗날 이 시절을 떠올리며 “베이징을 떠도는 동안 맨바닥에서 잠을 잘 때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레이 달리오가 '원칙'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었던 비결 '유형화'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레이 달리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창업자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투자의 전설 중 한 명입니다. 1975년,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방 두 개짜리 자기 아파트에서 시작한 회사를 40여 년 만에 운용 자산 1600억달러(약 193조원‧2019년 기준)에 달하는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로 키워냈으니까요. 자산 운용사란 쉽게 설명드리면 기업, 기관, 은행, 연기금, 정부 등 여러 투자자로부터 투자금을 받은 뒤 돈을 대신 굴려주고 대가로 수수료를 받거나 투자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는 회사입니다. 주식, 채권, 파생금융상품, 상품 선물 등 전 세계 시장의 다양한 상품에 투자해 최대한의 투자 수익을 거두는 게 목적인 회사죠. 자산 운용사 대신 헤지펀드 운용사로라는 말로 불리기도 합니다. 레이 달리오는 스스로에 대해 “빈털터리에서 부자가 되었고, 평범한 사람에서 유명인이 되었다”라고 말하는데요. 이 말처럼 그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부를 일궜습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2018년 조사에서 그는 177억달러(약 20조7000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세계 67위 부자로 뽑혔습니다. 그와 브리지워터의 명성이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난 이후부터였습니다. 금융위기 1년 전인 2007년에 그가 ‘앞으로 곧 큰 위기가 닥친다’고 경고하며 투자 전략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바꿨던 사실이 조명받았기 때문이죠. 위기를 미리 알아차리고 철저히 대비한 것은 막대한 보상으로 돌아왔는데요.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쓰나미가 전 세계를 휩쓸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지워터는 2008년에 14%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거둡니다. 당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대형 투자자들 대부분이 30% 이상의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이 같은 수익률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 금융위기의 여파가 남아있던 2010년에는 회사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거뒀고요. 브리지워터가 이런 성과를 거두자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던 그의 비결에 대해 사람들의 궁금증이 쏠릴 수밖에 없었죠. '투자업계의 스티브 잡스' 레이 달리오는 ‘투자업계의 스티브 잡스’라고도 불리는데요. 잡스가 자기 집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집을 사무실 삼아 비즈니스를 시작했고요. 잡스가 매킨토시, 아이팟, 아이폰 같은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상품을 내놓으며 시장 자체를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퓨어 알파 펀드’, ‘올웨더 펀드’ 같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투자 상품으로 시장을 휩쓸었습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드리겠지만 그는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인 197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를 활용해 시장의 흐름을 분석, 예측하고 투자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 이전까지 사람의 직관과 감에 크게 의존하던 투자업계에 데이터 분석과 수학적 추론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갖고 뛰어든 것이었죠.
명나라의 수명을 70년 연장한 개혁의 성공비결 3가지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장거정(張居正), 대부분의 독자분들에게 낯선 이름일 텐데요. 만약 이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다면 중국 역사를 상당히 잘 알고 있는 분일 듯합니다. 명나라 말기의 재상인 장거정에게는 ‘시대를 구했다’는 평가가 따라붙는데요. 명나라 276년 역사 동안 모두 164명의 재상이 있었지만 이 같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장거정이 유일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역사가들이 장거정의 업적을 평가하며 ‘그의 개혁 덕분에 망해가던 명나라의 생명이 70년은 더 연장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재상으로 나라를 이끌던 16세기 중후반, 중국 명나라는 인구는 물론 경제 규모에서도 세계 최대의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는 달리 외적의 침략, 공직 사회의 부패와 무능, 만성적인 재정 적자로 인해 나라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살인적인 세금과 지배계층의 착취에 시달리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한 장거정이 망해가던 나라의 생명을 반세기 이상 연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장거정의 사례를 통해 역사에 남는 성공적 개혁을 만들어낸 3가지 원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직을 더 효율적이고 강하게 바꾸기 위해서, 즉 조직을 개혁해나가는 데 필요한 전략과 원칙에 초점을 맞춰 설명드리겠습니다.
'경영의 신' 이나모리가 마쓰시타에게 배운 4가지 원칙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구 마쓰시타 전기) 창업자 그리고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자. 이 둘은 혼다자동차를 창업한 혼다 소이치로와 함께 일본에서 ‘3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마쓰시타는 1894년에 태어났고 이나모리는 1932년에 태어났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버지와 아들뻘의 나이 차가 있는데요.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쓰시타가 198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주 만나 기업 경영과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둘은 맨손으로 창업해 일본을 대표하는 큰 기업을 세운 탁월한 기업인이라는 점 말고도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요. 우선 둘 다 자신의 경영 철학과 회사를 경영하면서 얻은 경험을 책을 통해 알리는 데 매우 큰 노력을 한 경영 사상가라는 점이 같습니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지금껏 수십 권의 책을 냈고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팔린 그의 책을 모두 합하면 1500만 권이 넘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책들 중에서 절반인 750만 부가량이 중국에서 팔렸다는 겁니다. 마쓰시타는 후배보다 훨씬 더 대단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요. 그가 74살이었던 1968년 출간한 '길을 열다'는 지금껏 548만부가 넘게 판매된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베스트셀러입니다. (2019년 9월 기준)
쌀떡을 팔던 청년이 연매출 680억 식품기업을 일군 3가지 전략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 명의 인물과 마주치게 됩니다. 바로 창업자입니다. 전 세계를 주름잡는 글로벌 기업이더라도 처음엔 창업자 한 사람의 머릿속 아이디어와 의지, 그리고 행동으로 시작되기 때문인데요. 사람들은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낸 창업자를 동경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맨손으로 회사를 일궈낸 창업자일수록 더 큰 존경을 받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괴팍스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데에도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입양아 출신이면서 대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간 그만의 독특한 스토리가 큰 영향을 미쳤죠. 일본의 ‘경영의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는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3명의 기업인이 있는데요.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혼다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자 이렇게 3명입니다. 사실 일본에는 이들이 만든 회사보다 규모가 더 큰 기업들도 적지 않은데요.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같은 회사들이 그렇습니다. 일본의 3대 기업집단으로 꼽히는 이 회사들은 길게는 수백 년 전인 에도 막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일본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회사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회사들의 경영자가 아니라 앞서 말한 3명을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꼽습니다. 이들 3명이 남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서 시작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일본을 대표하는 큰 기업을 일궈냈기 때문입니다. 마쓰시타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요. 혼다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습니다. 이들보다 한 세대 뒤쯤 태어났고 3명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나모리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설움을 겪었죠.
부업으로 본업을 살린 센비키야와 츠타야의 '기정전략'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일본의 최고급 과일 전문점인 센비키야와 프랜차이즈 서점인 츠타야는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브랜드인데요. 일본 여행을 위해 관광 명소들을 찾아보신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 이름을 한두 번쯤은 접해 보셨을 겁니다. 이 두 브랜드는 특히 기업의 마케팅·브랜딩 전략을 고민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유명합니다. 츠타야 같은 경우는 ‘마케터의 성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죠. 이 두 회사가 유명한 이유는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온 차별화된 브랜드를 통해서 고객들이 스스로 매장 안으로 걸어들어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센비키야는 지금으로부터 186년 전인 1833년에 시작된 회사입니다. 현재 회사를 이끌고 있는 인물은 창업주의 6대손입니다. 지난해 매출은 92억엔(985억원)에 달합니다. 과일을 팔아서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더 큰 매출을 올리고 있는 것이죠. 센비키야에서 판매되는 과일들은 상품의 질과 가격 모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데요. 멜론 한 통이 30만원이 넘고, 망고 한 알이 15만원이 넘습니다. 자그마한 과일 바구니 하나를 사려면 3,40만원은 훌쩍 나가버리는 곳입니다. 츠타야는 일본 전역에 1500여 개의 매장을 두고 있는 프랜차이즈 서점인데요.
최고의 전략가들이 2500년 전 책에 열광하는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빌 게이츠 손정의 마크 저커버그 도널드 트럼프 마오쩌둥 더글러스 맥아더 헨리 키신저 보응우옌잡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조조. 이들은 모두 한때 세상을 주름잡았거나 지금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너무나 유명해서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인데요. 그래도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 있을 거 같아 말씀드리면 보응우옌잡은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기도 하는 베트남의 독립 영웅입니다. 1954년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군과 벌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베트남의 독립을 이뤄냈고요. 이후 미국과 벌인 베트남전에서도 ‘다윗의 승리’를 만들어낸 장군입니다. 헨리 키신저는 1970년대 미국의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자리를 동시에 맡아 미국의 외교 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입니다. 소련과의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외교 전략가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게 했던 인물들이라는 점 외에도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요. 바로 이들 모두가 ‘손자병법’을 읽고 거기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는 점이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서전을 통해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은 손자병법”이라고 말했고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자신의 책 ‘챔피언처럼 생각하라’를 통해 “손자병법은 시간을 투자해서 꼭 읽을 만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책”이라며 ‘손자병법’을 읽어볼 것을 추천했습니다. ‘손자병법’을 읽는 걸 넘어 이를 재해석해 자신만의 병법(兵法)을 만들어낸 인물도 있는데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손자병법’에 자신의 전략과 철학, 관점을 더해 ‘손의 제곱법칙’이란 이름의 경영 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참조 - 창업자 손정의가 사업을 급성장시킨 3가지 전략)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 역시 ‘손자병법’의 핵심 내용을 누구나 알기 쉽게 풀어낸 ‘16자 전법’을 만들었고요. 이 전략을 바탕으로 일본군과 국민당 정부군이라는 강대한 적을 꺾고 중국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지’의 영웅 중 한 명인 위나라 무제 조조 역시 ‘손자병법’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손자병법’의 여러 판본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버전은 조조가 직접 주석을 남겨놓은 판본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지휘하며 얻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손자병법’의 내용을 보다 알기 쉽게 정리했던 것이죠. ‘손자병법’은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인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장군이자 전략가였던 손무(孫武)가 쓴 책입니다. 손(孫)이라는 성씨에 뛰어난 사상가들에게 붙이는 자(子)라는 존칭을 붙여 손자(孫子)라고 부르고 있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손자병법’은 흔히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전략서’라고 불리는데요. 분량 자체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손자병법’은 6000여자의 한자로 쓰여 있는데요. 띄어쓰기 없이 워드에 옮긴다면 A4용지 3장에 들어갈 분량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분량이 상당히 짧은 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손자병법’이 2500여 년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살아남아 오늘날에도 ‘최고의 전략서’로 불리는 이유, 그리고 이 책이 군사·외교 전략뿐 아니라 기업인들이 경영 전략을 세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제가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느꼈던 이 책의 핵심 주제를 설명한 뒤 ‘손자병법’의 핵심 전략으로 꼽히는 허실전략이 적용된 사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뺏기지 말아라 “손자가 말한 수천 마디의 말은 ‘적을 능동적으로 이끌어야지, 수동적으로 끌려가면 안 된다’라는 이 한 마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중국 당나라의 장군이었던 이정이 ‘손자병법’의 핵심을 짚어낸 말인데요. 저 역시 ‘손자병법’의 핵심 내용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적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한상황에서도 목표를 달성하게 만드는 네이비씰의 '리더십 3원칙'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미국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씰(NAVY SEALS)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특수부대입니다. 영화, 드라마, 게임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부대라 군사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분들이더라도 그 이름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명령으로 창설된 네이비씰은 막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반세기 넘게 수많은 임무를 완수해온 덕분에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씰(SEALS)이라는 부대 이름은 바다(SEa), 하늘(Air), 땅(Land)의 약자를 합쳐서 만든 이름인데요. 육해공 어디서든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부대라는 뜻입니다. 네이비씰이 완수했던 가장 대표적인 작전으로는 2011년 5월,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넵튠 스피어 작전’을 들 수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네이비씰 대원의 헬멧에 달린 캠코더를 통해 빈 라덴의 최후를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특수부대인 만큼 네이비씰은 일반 정규군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임무에 주로 투입되는데요. 이라크에서 미군과 반군 게릴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2006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이라크에서 반군의 저항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은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州)의 주도인 라마디였습니다. 반군의 본거지로 꼽히는 인구 40만여 명의 도시였죠. 도시의 대부분을 반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빅마트'의 성쇠에서 배우는 약자가 강자와 싸우는 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회사가 무너진 이유를 가장 생생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이는 역시 회사를 창업해 직접 이끌었던 오너 CEO일 텐데요. 하지만 망한 회사의 창업자로부터 직접 실패 원인에 대한 설명을 듣기란 쉽지 않습니다. 큰 규모로 사업을 일궜다가 무너져버린 창업자들 중 많은 분들이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공개적인 자리에 나서지 않고 있고, 어렵게 이런 분들을 만난다고 해도 고통스러웠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꺼리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실패한 기업과 기업인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소개해드릴 하상용 로컬푸드 빅마트 대표의 사례는 아웃스탠딩 독자 분들께 도움이 될 거 같은데요. 그가 서른네 살이던 1995년에 광주에서 창업한 대형마트 유통업체인 빅마트는 2000년대 중반 연매출 2000여억원에 직원 3000명 (협력업체 파견직원 2000명 포함) 규모까지 성장합니다. 전국 유통업계 순위 7위에 해당하는 몸집이었죠. 자본금 5000만원을 갖고 시작한 회사가 10여 년 만에 이 정도까지 성장했으니 그 성장 속도가 매우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빅마트는 광주‧전남 지역을 터전으로 하는 업체였는데요. 해태, 나산, 금광, 거평 등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대기업과 중견기업 계열 대형마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광주‧전남 지역 유통업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빅마트는 설립된 지 12년 만에 무너져 내렸는데요.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라는 전국구 대형마트들이 빅마트의 근거지인 광주‧전남 지역으로 잇따라 진출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들과 맞서기 위해 점포를 무리하게 늘렸던 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하상용 대표를 모두 세 차례 만났고 그가 출간한 ‘다시 일어설 용기만 있다면’이란 책도 읽었는데요.
후지필름의 부활로 보는 '좋은 전략’을 만드는 4단계 기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기업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은 자신이 만든 상품을 내다 팔던 시장 자체가 사라지는 일입니다. 소비자들이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경쟁자들이 만드는 상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을 말하죠. 수많은 기업과 이들이 생산한 상품, 그리고 상품을 구매하던 소비자들로 붐비던 시장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거의 사라져버린 비교적 최근 사례로는 사진 필름 시장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필름 판매량은 곤두박질쳤고 결국 필름 제조업체들의 도산으로 이어졌습니다. 2000년 그 규모가 정점을 찍은 전 세계 사진 필름 시장은 이후 10년간 급속하게 시장 규모가 쪼그라들었습니다. 매년 20~30%씩 규모가 줄어든 탓에 2010년의 필름 시장 규모는 2000년의 10%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전 세계 필름 업계 1위로 군림하던 미국의 코닥 역시 이 같은 상황을 견뎌낼 수 없었는데요. 코닥은 2012년 1월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며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런데 코닥이 무너지던 그해 일본의 필름 제조업체 후지필름이 거둔 실적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후지필름의 2012년 매출은 22조1470억 원이었습니다. 사진 필름 제조·판매라는 주력 사업이 무너져버리는 극심한 위기를 이겨내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낸 덕분에 20조 원이 넘는 매출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죠. 아직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세계 경제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했던 시기였고 또 일본 기업들이 엔고(일본 엔화 가치가 높아져 일본 기업이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현상) 때문에 사업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기에 후지필름의 실적은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간 필름업계 1위로 군림하던 코닥은 파산했는데 어떻게 만년 2위 후지필름은 살아남아 계속 성장할 수 있었을까?’
'영단기·공단기 회사'의 지식 플랫폼 '커넥츠'를 주목하는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콘텐츠 업계, 그중에서도 깊이 있는 정보를 다루는 지식 콘텐츠 업계에는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월 정기 구독 모델을 바탕으로 구독자들에게 콘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부쩍 늘어났는데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아웃스탠딩이나 퍼블리, 북저널리즘 같은 서비스들이 대표적인 지식 콘텐츠 업체입니다. 포털과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뉴스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들입니다. 이 서비스들은 주로 자기 계발에 대한 관심이 높고,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무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25~45세 사이 직장인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라면 한 달에 1만~2만 원 정도는 기꺼이 지갑에서 꺼낼 수 있는 독자층이죠. (참조 - 퍼블리 vs. 스리체어스… 출판의 영역을 넓힌 루키들) 성장하는 지식 콘텐츠 시장 영상과 음원 시장을 중심으로 정기 구독 모델이 널리 자리 잡으면서 매달 돈을 내고 콘텐츠를 이용하는 것에 사람들이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주로 텍스트 형태로 제공되는 지식 콘텐츠에 대한 소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인들의 자기 계발 욕구도 계속 높아지고 있고요. 더 이상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만 갖고는 직장 생활을 해나갈 수 없게 됐으니까요. 과거보다 회사를 옮기는 일도 훨씬 잦아졌고,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싶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만 하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오프라인 행사, 유명 연사 없이 흥행에 성공하는 방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기자로 일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은 ‘내 생각이 결국 글에만 머문다’는 건데요. 제가 아무리 뛰어난 경영자들의 경영 철학이나 효율적인 경영 기법을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그 내용들은 결국 기사에만 담길 뿐입니다. 제가 배운 지식들을 실제 비즈니스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힘들죠.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을 실천으로 옮길 기회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기자 생활을 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많은데요. 다행히 지난 2년간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제가 배운 지식을 실전 비즈니스에 활용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인 저는 2016년 말부터 한국경제신문과 네이버의 합작법인인 네이버FARM판에 파견 와서 일하고 있는데요. 이곳은 네이버 포털 안에서 농식품 관련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콘텐츠 기업입니다. 이곳에 와서 일한 2년 7개월 동안 편집국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다양한 비즈니스 경험을 쌓을 수 있었는데요.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유료 농업 포럼을 기획해서 2년간 운영한 일이었습니다. 포럼이라는 상품을 기획해서 마케팅하고 판매해 이익을 내는 사업이죠. 이번 글은 지난 2년 동안 제가 <팜 테크 포럼>이라는 오프라인 행사 상품을 기획, 판매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내 보겠습니다. 정부와 기업 돈을 단 한 푼도 받지 않는 유료 농업 포럼이라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상품을 내놓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아웃스탠딩> 기고 글을 통해 여러 차례 설명했던 ‘블루오션(Blue Ocean)’ 전략을 어떻게 실제 업무에 적용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지식을 팔아 돈을 버는 방법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중국 속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두 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일은 남의 지갑에서 돈을 빼오는 일이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머릿속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는 일이다” 그런데 이 속담을 찬찬히 뜯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따로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바로 ‘남의 머릿속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는 일로 돈을 버는 일’입니다. 지식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 일은 제가 지난 2년여 동안 계속해서 고민해온 일이기도 한데요. 오늘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 즉 콘텐츠를 팔아서 돈을 버는 방법을 풀어내 보겠습니다. 아웃스탠딩 독자님 중에는 콘텐츠‧미디어 업계에 계시는 분들도 적지 않을 텐데요. 콘텐츠 분야 기업에 계신 분들 그리고 회사를 알리고 제품을 마케팅하기 위한 콘텐츠 제작을 고민하시는 분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기 책을 내고 싶어 하시는 분들께 특히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신문사 기자인 제가 왜 ‘지식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지식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부터 설명드려야겠죠. 저는 한국경제신문 기자인데요. 2016년 말부터 한국경제신문과 네이버가 합작 투자해서 만든 네이버FARM판에 파견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FARM판은 네이버 포털 안에서 농업과 식품산업, 귀농귀촌, 도시농업 등 농식품 분야에 대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워런 버핏이 선택한 '전용기 공유 회사' 넷제츠 이야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세계적인 부호입니다. 2019년 3월 포브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825억 달러(97조여 원)에 달합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가는 부자입니다. 97조 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그는 동시에 ‘짠돌이’로도 유명합니다. 그에 대해 소개할 때면 항상 따라오는 일화들이 몇 개 있습니다. ‘60년 전에 구입한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12달러의 이발비를 내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다’ ‘20년 넘게 도요타의 캠리 자동차를 스스로 몰고 다닌다’ 엄청난 재력을 갖고 있지만 검소하게 살아간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들인데요. 이처럼 절약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였기에 1989년 버크셔 해서웨이에서 처음으로 회사 전용 비행기를 샀을 때 ‘Indefensible’(도덕적으로 변명할 수가 없다는 뜻)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이해가 됩니다. 회사 일을 위해 전용 비행기를 구입하긴 했지만 이만큼 큰 낭비가 없다는 뜻이었는데요. 사실 버핏은 이전에 다른 기업의 경영진들이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걸 비판한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몇 년 뒤 버크셔 해서웨이에서 더 큰 전용 비행기를 구입하자 이때는 ‘indispensable’(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이라는 뜻)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몇 년간 전용기를 타보니 자기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게 얼마나 편하고, 또 업무에 도움이 되는지 직접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1998년엔 전용기 공유 회사 넷제츠를 인수합니다.
'거울, 남자, 화장'을 없애 새 피트니스 시장을 개척한 커브스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에서 커브스(Curves)라는 프랜차이즈 피트니스 센터를 알고 있는 분이 계시나요? 아마 여성분들 중에서는 이곳의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이 그래도 꽤 계실 거 같고, 남성분들 중에서는 아는 분이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여성들만 운동할 수 있는 여성 전용 피트니스 센터이기 때문이죠. 1992년 미국 텍사스주 할링겐에서 게리 헤이븐과 다이앤 헤이븐 부부가 1호점 문을 열면서 시작된 커브스는 약 30년 만에 전 세계 90개국으로 뻗어나갔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318개 지점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IT산업과 스타트업에 대해서 다루는 아웃스탠딩에서 왜 갑자기 여성 전용 헬스클럽 이야기를 하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거 같은데요. 제가 처음 커브스란 피트니스 센터를 알게 된 건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블루오션 전략>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커브스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죠. 이 책에는 새로운 시도로 기존에 없던 신시장을 개척해낸 많은 기업들의 사례가 나와있는데요. 커브스도 그중 한 곳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커브스의 사례를 통해 다양한 비고객 집단을 관찰한 뒤 그동안 내 물건을 사지 않던 이들에게 내 상품을 팔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고객을 고객으로 만든다는 건 새로운 수요와 시장을 창출한단 말과 같습니다. <블루오션 전략>에서 말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기법은 모두 여섯 가지입니다. 1. 산업 내 전략별 그룹들을 관찰하라 2. 대안 사업을 관찰하라 3. 구매자 체인을 관찰하라 4. 보완적 제품 및 서비스를 관찰하라 5.구매자를 끌어당기는 기능적 또는 감성적 매력을 관찰하라 6. 시대의 흐름을 관찰하라
'변방의 와인' 옐로우 테일은 어떻게 시장을 재정의했나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평소 와인을 즐기시지 않는 분들이더라도 옐로우 테일(yellow tail)이란 와인 브랜드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마셔보신 분도 적지 않으실 겁니다. yellow tail이라고 소문자로 적힌 브랜드 아래 캥거루 한 마리가 뛰노는 오스트레일리아산 와인이죠. 옐로우 테일은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수출량의 20%를 차지하는 국가 대표 와인인데요. 전 세계 50여 개 국가에 수출되고 있죠. 옐로우 테일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가성비입니다. 한국에서도 마트나 편의점에 가면 750ml 한 병에 1만원대 가격으로 살 수 있죠. 와인은 비싸다는 고정관념을 깬 저렴한 가격이죠. 맛도 괜찮은 편입니다. 와인의 깊은 맛을 음미할 줄 모르는 와인 문외한이더라도 부담 없이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옐로우 테일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와인 브랜드입니다. 와인 시장 전문 조사기관인 ‘와인 인텔리전스’가 지난 3월 발표한 ‘글로벌 와인 브랜드 파워 인덱스 2019’ 조사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와인 브랜드1위로 뽑혔죠. 전 세계 20개국에 있는 2만 명의 와인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입니다. 미국 와인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굳건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주류 전문매체 더드링크비즈니스에 따르면 옐로우 테일은 2017년에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와인 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옐로우 테일 와인은 언제부터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걸까요?
손정의가 '료마'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은 3가지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오늘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을 비롯한 수많은 일본인들이 사카모토 료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835년 일본 남서부에 자리 잡은 도사 번(오늘날의 고치 현)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료마는 메이지유신 직전인 1867년 자객들의 칼을 맞고 숨을 거둡니다.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건데요. 그가 검술 수련을 위해 난생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에도(지금의 도쿄)로 향했던 건 1853년입니다. 그리고 14년 뒤 그는 교토에서 숨을 거둡니다.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을 해냈길래 그는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걸까요? ‘최초의 일본인’이라는 호칭과 함께 말이죠. 손정의를 매료시킨 인물 제가 처음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건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웃스탠딩>에 처음 기고한 글이 ‘손정의가 사업 초기 사업을 급성장시킨 전략’을 다룬 글이었는데요. (참조 – 창업자 손정의가 사업을 급성장시킨 3가지 전략) 이 글을 준비하기 위해 손정의에 대한 여러 자료를 읽어봤습니다. 그가 중앙일보에 직접 기고했던 20건의 글도 읽었고요. 그에 대해서 다룬 책도 여러 권 읽어봤습니다. 그가 국내 언론과 했던 인터뷰 기사들은 물론이고요.
스타트업이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조건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필립 피셔는 성장주 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워렌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그를 가리켜 “필립 피셔는 오늘의 나를 만든 스승이다”라고 말했는데요. 그가 이처럼 유명한 투자자로 꼽히는 건 1950년대에 처음으로 ‘성장주(Growth stocks)’라는 개념을 소개해 이후 월 스트리트의 투자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창안한 성장주 투자란 아주 쉽게 말하면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되는 초창기 기업에 투자한 뒤 그 기업이 충분히 커나갈 때까지 장기간 기다리는 전략을 말합니다. 잠재력이 높은 초기 기업에 투자한다는 면에서 스타트업들에 대한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벤처캐피털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필립 피셔의 투자 철학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투자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는 관찰력,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 과감하게 밀고나가는 결단력이란 자질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요. 워렌 버핏이나 레이 달리오 같은 유명 투자자들의 책을 보면 재테크 서적이라기보다 철학 서적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필립 피셔가 쓴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 (Common Stocks and Uncommon Profit)>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게 1958년이니까 한국에선 이승만 정부가 집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온 지 61년이나 됐지만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널리 읽힙니다.
직장인으로 일주일에 하루만 활용해 6개 채널을 운영한 노하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매출은 최대로 비용은 최소로” 저는 지금껏 아웃스탠딩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 비용 절감을 통해 고수익 경영을 이뤄낸 기업들의 사례를 자주 설명해왔는데요.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보지 않고 회사를 경영한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의 아메바 경영, (참조 - 준비 없는 창업자가 경영의 신이 된 비결 ‘아메바 경영’) 상품 기획 단계부터 원가 절감 방안을 연구하는 도요타 생산방식(TPS) 등이 그런 사례들이었습니다. (참조 - “가격은 회사가 정하는 게 아니다” 도요타가 이익을 만드는 비결) 제가 비용 절감에 성공한 기업들의 사례를 연달아 설명한 건 상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모든 과정에 들어가는 돈, 시간, 노력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회사가 이익을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선 회사가 아닌 개인 창작자와 미디어‧콘텐츠 스타트업들에 적용할 수 있는 비용 절감 방안을 다뤄보겠습니다. 제가 일주일에 하루만 활용해서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경영>이란 이름의 블로그와 팟캐스트, <홍선표의 고급지식>이란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동시에 운영할 수 있었던 노하우와 이 콘텐츠를 바탕으로 책을 출간해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경험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이버가 창작자들에게 돈을 주기 시작한 이유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저는 삼성SDS 이해진 과장이라고 합니다. 사내 프로젝트 담당자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995년 삼성전자 본사 기획실을 찾은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꺼낸 첫마디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추진하던 인터넷 서비스 개발 프로젝트가 상부의 지시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직접 본사 기획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프로젝트 중단을 막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검색엔진과 콘텐츠를 앞세워 일단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면 반드시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게 그가 설득을 위해 내세운 논리였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시는 분이라면 계열사 직원이 회사 방침을 거스르기 위해서 본사 기획실을 불쑥 찾아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잘 아실 텐데요. 그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승부수를 던졌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해진 창업자가 이끌던 팀은 삼성SDS의 1호 사내벤처로 뽑히면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 팀으로부터 오늘날의 네이버가 탄생하게 되는데요. 애초에 이해진 창업자가 구상했던 대로 네이버는 검색엔진에 다양한 콘텐츠를 붙여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방식으로 빠른 속도로 이용자를 늘려나갔고 오늘날과 같은 거대 IT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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