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이 준비된 창업자가 될 수 있었던 3가지 비결
*이 글은 외부 필자인 홍선표님의 기고입니다. 1933년 9월의 어느 저녁,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여섯 살 소년이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부산항에 들어섭니다. 돈을 벌기 위해 몇 년 전에 일본으로 떠났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었는데요. 이 모자의 눈앞에 철로 건조된 4000톤급의 여객선 쇼케이마루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나타나자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가난한 어촌 마을에 나고 자란 소년에게 그동안 봐왔던 고기잡이배보다 몇천 배나 큰, 전기 조명에 밝게 빛나는 철선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괴수의 모습처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소년이 처음 근대의 웅장한 실체인 철(鐵)과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17년이 흐른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인근. 거세게 땅을 두드리는 굵은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국방색 전투복 차림의 스물세 살의 육군 대위 한 명이 소총 방아쇠에 검지 손가락을 건 채 전방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캐터필러의 육중한 소음이 북한군의 T34탱크들이 그의 부대를 박살내기 위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사흘이나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터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정신만은 또렷했습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가 제대로 뜻 한번 펴보지 못한 채 현대 기계공학의 산물인 강철 탱크에 짓눌려 목숨을 잃게 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얄궂기만 한 운명이었습니다. 다시 19년이 지난 1969년 12월, 경북 포항 영일만. 매서운 한겨울의 바닷바람이 황량한 모래벌판을 깊게 할퀴고 지나가는 그 자리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쇳물의 빛깔을 닮은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군인들처럼 열과 오를 맞춰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습니다. 잠시 뒤 한 40대 남성이 그들 앞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 외쳤습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우리 농민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의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일제의 35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받아낸 대일청구권자금을 토대로 시작된 제철소 건설 사업이었으니 조상의 혈세로 짓는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